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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Dec 01. 2019

(전시 리뷰) 바우하우스_금호미술관

bauhaus and modern life

예술플랫폼 <아트렉처> 연재 중인 글이다.

여기 이 의자를 보자. 구부러진 철제 프레임과 천으로 된 등받이가 특징이다. 오래 앉아있기는 힘들지만 가끔 짧은 시간 머무르기엔 적당한 의자. 주변에 너무나도 흔히 볼 수 있어 디자인이라 부르기에 과하다 싶은 생각을 갖게 만드는 이 의자는 사실 7-80년 전에 탄생한 디자인이다. 다시 말해, 그때는 ‘신박한’ 디자인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이런 디자인이 탄생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누구에 의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모두의 디자인이 되어 버린 이 디자인의 탄생지에 관한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자.

오늘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디자인의 의자와 책상 -금호미술관 바우하우스 전시에서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독일에서 ‘바우하우스’라는 예술 학교가 설립되었다. ‘바우하우스’란 ‘집을 짓다’는 뜻이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국가 재건이 필요했다. 대단한 건축가이자 바우하우스 초대 학장이었던 발터 그로피우스 역시 건축을 통해 새로운 사회 건설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의 바람처럼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는 건축, 공예, 회화, 조각, 공연, 타이포그래피와 같은 시각예술을 총망라한 예술 학교로 출범하였다. 물론 그러피우스와는 다른 생각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기에 갈등은 상존했다.


바우하우스의 설립 취지처럼 그로피우스가 추구했던 디자인은 심미적인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것에 초점이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새로운 건축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바뀌는 새로운 세상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바우하우스 선언’을 보면 이에 대한 대답이 나온다. “미래의 새로운 구조를 함께 열망하고 인식하고 창조하다. 그 미래의 구조는 건축과 조각, 회화를 하나의 종합체로 만들어낼 것이며 어느 날 새로운 신념의 결정적 상징과 같이 수백만 작업자들의 손으로부터 하늘로 솟아오를 것이다.”


이러한 그로피우스의 신념을 반영하듯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특이한 점은 바우하우스에서는 독일의 전통적인 도제 방식을 수용하여 교수 대신 ‘마이스터’라 불렀다)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들로 가득했다.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요하네스 이텐에 이어 라슬로 모호이너지, 오스카어 슐레머, 라이오넬 파이닝, 그리고 2대, 3대 학장이었던 하네스 마이어, 루디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교과과정 역시 독특했다. 형태와 색채에 관한 기본 원리를 6개월간 이수한 후, 공예와 형태 교육을 3년간 이수해야만 했다. 예술과 기술이 완벽하게 조화된 새로운 디자이너의 탄생이었다.

바우하우스의 기초 과정에서 학생들이 지겹도록 마주쳐야 했던 삼각형, 사각형, 원형, 색채 -금호미술관 바우하우스 전시에서

하지만 학교의 운영은 그로피우스의 포부만큼 쉽지는 않았다.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전후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경제는 파탄이 나 끝모를 인플레이션으로 재정난에 시달렸고, 이는 바우하우스가 처음 설립된 지역인 바이마르 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바이마르 사람들은 학생들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실험적인 수업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에 그로피우스는 학교를 데사우로 옮겼고 이곳에서 교육과정 방향을 산업디자인으로 완전히 틀면서 바우하우스만의 정체성이 탄생하였다.


게다가 나치가 독일을 장악한 후 바우하우스에는 또다른 시련이 닥쳤다. 2대 학장이었던 마이어의 정치적 성향 탓에 나치는 그를 해임했고 3대 학장으로 미스 반 데어 로에가 학장을 맡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나치의 탄압이 이어졌고 학교는 결국 폐쇄되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개인적으로 바우하우스를 인수하여 베를린으로 장소를 옮겨 계속 운영하려 시도했지만 이 역시 나치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결국 바우하우스는 해산되기에 이른다. 이후 많은 교수와 학생들은 프랑스, 미국, 스위스 등 여러 나라로 흩어져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전 세계로 퍼트렸다.


• 영상으로 보는 전시 - in아트

카카오티비 - in아트

그런데 1919년부터 1933년까지 14년에 이르는 기간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존속했던 이 디자인 학교가 다시 재조명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단지 100년 전(2018년 바우하우스 탄생 100주년을 탄생하여 세계적으로 많은 행사가 열렸었다) 탄생한 디자인 학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에서도 보았듯 당대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새로운 예술과 디자인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시도했다는 데에 있다. 오늘날 세계 모든 디자인 학교에서 디자인을 위한 기초 소양과목의 모델을 설계한 곳이자, 현대적 디자인의 표준이 되는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한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다는 데 있다. ‘실용적인 디자인’이란 결국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나은 생활을 제공해야 한다’는 신념에 있다. 물론 바우하우스가 모든 것을 해낸 건 아니다. 다만 단순한 형태와 값싼 재료, 소통 가능하면서도 편리하게 공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건축, 무엇보다 값싸면서 대량 생산이 가능한 제품이 가능한 디자인을 창조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육체는 사라져도 정신은 남는’ 것처럼 1919년 설립된 바우하우스라는 학교는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당시의 교수들과 그 졸업생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우하우스 정신’이고, 지금 바우하우스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금호미술관 바우하우스 전시가 2020.2.2 까지 열린다

예술, 인간 이상을 향한 진격
by 김바솔


^엮인 글 : 왜 백남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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