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95 마이런

첫 풀코스 마라톤 / 제주 국제 관광 마라톤 축제

첫 풀코스 마라톤을 제주에서 치렀다

하프 마라톤도 겨우 소화를 하면서 성급하게 덤빈 감이 있었지만 부족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여름 대회에 대비한 경험이 필요했다

지금껏 달리기로는 22km를 넘어본 적이 없고 걷기로도 30000보가 최고 기록에 불과한 내가 지구력 하나를 밑천으로 삼아 제주 땅을 밟았다

지나고서야 하는 말이지만 마라톤 풀코스 42.195km는 지구력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근력'

풀코스는 다리 근육이 얼마나 버텨주는가에 따라 완주의 판가름이 난다고 봐야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완주는 성공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지만 기록은 형편없었다

이 글은 형편없는 기록의 풀코스 마라톤 참가 반성 기록이다

2019 제주 국제 관광 마라톤 축제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짐을 내리고 바로 마라톤 대회가 열릴 코스 탐사에 나섰다

구좌, 김녕 해수욕장에서 월정, 평대, 세화를 거쳐 하도 해변, 종달 해안 도로로 이어지는 해변 코스

그리고  반환점을 돌아 출발했던 구좌 종합운동장으로 돌아오는 다소 먼 거리의 달리기 여행이 될 터였다

이름난 관광지이기도 하고 몇 번의 제주 여행을 통해 이 라인의 맛집이나 카페 몇 군데 정도는 꿰고 있는 익숙한 코스였지만 아는 길이 무섭다고 거리가 주는 압박감에 마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거리도 거리지만 풀코스의 참가자는 10km 코스나 하프에 비해 그리 많지가 않다

참가 인원이 많지 않다 보니 풀코스와 하프 코스의 참가자들이 함께 출발을 한다

정말 많은 검색에서 얻은 얕은 지식에 따르면  하프 참가자들과 함께 시작을 하다 보면 더 장거리를 달려야 하는 풀코스 주자의 입장에서 밸런스가 흐트러질 수 있다고 하는데 물론 나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만 참가 인원이 적은 이 상황에서 혼자 꼴찌로 쳐져 외롭게 달리는 상상에 부담을 느껴 숨쉬기도 힘에 부쳤다

인터넷에 글을 아무리 찾아봐도 좋은  기록으로 골인한 사람들의 경험담뿐

(뭐 그러니까 글을 쓰셨겠지만)

나처럼 부담돼서 심장마비나 호흡곤란으로 죽을 것 같아요라는 의견은 찾아볼 수 없어 다시 한번 절망했다

너무 긴장해 새벽 2시부터 눈을 말똥말똥 뜨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집합은 8시였고 각종 행사 후 9시 출발이지만 비장한 마음으로 일찍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기념 티셔츠 대신 좋아하는 오사카 마라톤 티셔츠를 입었다

(우메다 지하상가 미즈노에서 우연히 구입했음)

마라톤 코스가 등에 프린트된 오렌지 컬러의 셔츠인데 이날 스쳐 지나가는 분들이 '오사카 마라톤 파이팅'이라고 불러주셨었다

대회가 시작될 구좌 운동장에 일찍 도착해 홍보 부스에도 놀러 다니고 기념품이나 홍보물도 많이 받았다

(이 과정을 우리 남편이 굉장히 좋아한다

마치 시골 장터에 놀러 나온 관광객 같다)

국제 대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외국인 참가자들도 많았는데 대만이나 중국은 관광버스까지 대절해 참가 규모가 정말 컸고

사이사이 풀코스 배번을 단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봤지만 한결같이 멋진 다리 근육을 가졌거나 러너의 포스를 뿜어내고 있어 한층 더 기가 죽어버렸다

욕심 없이  완주나 하자하고 스스로 계속 달래는 가운데 출발 시간이 다가왔고 평소와 비슷한 자리를 잡고 카운트다운에 임했다

3!

2!!

1!!!

출발!!!!

 힘차게 발을 내딛고 출발했다

시작부터 안 좋았던 것이 첫 2km가 좋아 방심하는 사이 호흡이 가빠졌다

아직 40km가 남았는데 벌써?

평소 같았으면 15km 지점까지는 문제없이 갔겠지만 일단 발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가까이 급수대가 있어 물을 마시는 척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다시 가보자 '

천천히 다시 시작하는 사이 한 명 한 명 나를 앞질러 갔고 그들을  보내며 조급해지지 않으려 스스로를 달래는 가운데 제주의 강렬한 오전 햇빛이 드러난 살갗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름이 느껴졌다

바람도 얌전하지 않아 맞바람을 맞으며 그 짧은 거리를  달리는 동안 정신이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솔직히 연습으로 달리다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이날은 달리기를 접었을 것 같았다

10km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나는 끝나 있었다

다만 '아 못하겠어'라고 생각한 순간 거리에서 누군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응원을 건넸다

교통정리를 해주시는 분이라던가 급수대의 자원봉사자분들, 혹은 그냥 휴일의 이른 시간 거리에 나와있던 누군가의  응원의 말들이 일찍 지쳐버린 내 귀에 꽂혀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 달린다

어제 지나갔던 오일장, 그 옆의 물을 사 먹었던 편의점

지난 여행 때 맛있게 식사했던 문어 덮밥집, 휴무일이라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렸던 카페

맛있었던 성게 국숫집, 바로 전날 떡볶이와 한치 튀김을 사 먹었던 분식집

골고루 스치며 거리를 늘려나갔다

15km 지점을 지나면서 해변 관광지를 뒤로하고 다소 지루한 길로 접어들었다

2주만 지나면 수국이 예쁘게 피었을 길이지만 이날은 그 저 푸릇푸릇하고 재미없는 주로에 불과했다

게다가 언덕길이라 앞서 올라간 사람들이 보였는데 깨알만 한 점처럼 저 앞을 군데군데 달려가고 있었으며

그보다도 일찍 반환점을 통과한 주자들은 나와 엇갈려 이미 되돌아가고 있었다

반환점을 통과했을 당시 이미 평소보다 15분이나 늦은 상태였고 역시 이번 대회는 끝났구나라는 생각에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눈앞이 하얗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잠깐 멍하니 걸어 내려오는데 아직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 나는 먼저 경험했지

나는 출발이 빨라 기록과 별개로 뒤에 사람들이 있었지

뒤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없던 기운이 났다

'마저 가자'

다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리막길이라 잠깐이나마 탄력을 받아 뒤처진 거리를 뺄 수 있었다

생각보다 22~28km 지점은 수월하게 지날 수 있었지만 역시 풀코스의 장벽은 높았고 내가 지체하는 사이 한 사람 한 사람 나를 추월해 멀어져 갔다

지쳐서 더 이상 조급한 마음도 들지 않았고 보이는 급수대마다 들러 물을 마시고 스프레이 파스를 뿌려달라 부탁을 했다

물을 많이 마시면 퍼진다지만 나처럼 마지못해 기다시피 가는 사람에겐 해당 안 되는 이야기였고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말랐다

나중엔 땀 식히는 스펀지를 들고뛰며 잠깐씩 입에 물어 갈증을 달래기도 했다

30km를 지나면서 남은 러너 사이의 간격은 더 벌어져 나름의 함께 달리는 무리가 생겼다

힘이 떨어져 속도도 비슷하고 여기부턴 동반 달리기나 다름없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의지해 달렸다

상대가 힘을 내 멀어지면 나도 힘을 내 조금이나마 따라간다

그리고 나도 같은 역할을 해준다

지구력으로 달리는 한계는 30km까지고 이후로는 체내에 축적된 지방을 태우며 달린다고 들었고 지방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는데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이 잘근잘근 썰리는 느낌이랄까

발목이 너무 아팠고 그다음엔 허벅지 안쪽의 깊은 부분이 잘리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오래 달린 후에 깨달았지만 이 정도 달리고 나면 호흡은 생각도 안 난다

숨쉬기는 굉장히 편안하고 의식되지 않지만 발과 다리의 뻐근한 통증이 어마어마했다

내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헉헉거리는 사이 포기자들을 위한 차량이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타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이왕 이렇게 된 것 골인은 하겠다며 고집스럽게 길에 남았다

점차 차량 통제도 풀려 한쪽 차선에선 차들이 달리고 있었고 가게들은 영업을 시작하고 관광객들이 해변을 채우고 있었지만 이 번에 못하면 다음에 또 이 꼴을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걷뛰걷뛰 하며 남은 거리를 메꿨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급수대에서 음료를 받아 마셨다

5시간 가까이 길에 있었고 계속 물을 마셨지만 화장실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

오히려 카페를 스칠 때마다 아이스커피 한 잔이라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

골인하면 제일 먼저 얼음을 가득 채운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하겠다는 그 생각으로 5km쯤을 버텼던 것 같다

이 코스가 말이 해안이지 높낮이가 은근히 있어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며 어느 언덕 위를 걸어 올라가고 있는데 저 멀리 누군가가 팔을 휘휘 크게 저으며 나를 부르는 게 느껴졌다

"부인아!!"

꿈에 들어도 반가울 남편의 목소리다 

내가 너무 늦으니 골인 2km 지점까지 마중 나왔다는데 내 모습이 보이자 손을 흔들어 지친 나를 반겨줬다

활짝 웃는 모습이 너무 반가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원래는 뛰는 걸 힘들어하는 사람인데 이때는 지쳐있는 나를 달래려 더 활기차게 앞서 뛰어 이끌며 산만한 내 정신을 모아 주려 이런저런 말을 건네고 힘을 북돋아줬다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는 근방에 있던 다른 분들도 응원을 해주시거나 함께 달리며 용기를 주셨다

도착이 너무 늦어 부끄럽다 하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격려해주신 분이 계셨는데 정말 힘이 됐고 눈물이 날 만큼 감사했다

그 늦은 골인을 기다려 행사를 진행해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했다

혼자 마지막 골인을 향해 달려가는데 내 배번을 확인하고 이름을 불려주셨고 나보다 앞질러 달려가 기다리고 있던 남편은 골인하는 나를 두 팔 벌려 반겨 안아줬다

눈을 질끈 감는데 눈물이 흘러 뚝 떨어졌다

눈물이라기보다는 긴 한숨이었다

달리는 고비고비가 갈등이었고 종교는 없지만 부처님도 하나님도 열두 번은 더 만난 것 같았다

그렇게 가도 가도 줄어들 것 같지 않던 그 거리도 끝은 있었다

첫 풀코스 기념 메달

완주의 감상을 누리기엔 민망하게 기록은 생각보다 더 안 좋았다

05 : 05 : 35

완주 후 신발부터 벗었다

발톱 몇 개를 이번 완주와 맞바꾼 것  같지만 다시 자랄 발톱이 이제 와서 중요하거나 마음 쓰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종아리에 약간 올라온 근육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완주 후에 먹을 수 있는 전복죽도 당당하게 받아서 맛있게 먹었다

죽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그렇게 간절하던 아이스커피 생각도 수그러들었다

죽을 먹고 쉬다가 천천히 걸어 경기장을 빠져나오는데 그때까지도 골인 지점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어떤 기분으로 달려오고 있는지 너무 잘 알기에 박수를 드리고 싶었다

이른 아침부터 부녀회 자원봉사자분들이 나오셔서 전복죽을 직접 끓여 나눠주셨다

이 대회를 정리하자면 체력이나 경험이 부족하기에 겁 없이 덤빌 수 있었지만 정말 위험했던 도전이었고

결국 체력을 약간 앞섰던 지구력의 승리였다고 말하고 싶다

매번 이런 요행이나 고집이 통할 리 없고 결국은 착실한 훈련으로 벌어진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

한 발짝 내딛는 것도 고통스럽던 느낌은 달리기가 끝남과 동시에 사라졌다

마지막을 함께 달렸던 남편이 보기엔 내게 기운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첫 장거리의 공포에 눌려 힘들다고 머릿속이 나를 속였을 거라고 다음엔 지지 말라고 격려해줬다

다음날 다시 한번 달리기 코스에 갔었는데 달리지 않고 바라만 보자니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마음속에 잘 새겨 내년엔 더 잘 달리고 싶기도 하고

달리며 마음에 담고 지나쳤던 식당에 들러 식사도 하고 그토록 바랬던 커피도 마시며 전날의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엔 어떻게 달릴지 생각도 정리하고 목표로 하는 시간대도 설정했다

내 체력으로 20분 정도는 당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붙었다

다음엔 겁먹지 말고 이번 런을 경험 삼아 좀 더 잘 뛰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