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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러너 May 31. 2019

42.195 마이런

첫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다


운동화는 피가 배어 나와 검붉게 얼룩져 있었다

사실 달리는 동안 고통스러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에 발가락이 터진 것도 몰랐다

그보다도 도중에 넘어져 팔꿈치에 상처가 크게 난 상태라 온통 신경이 눈에 보이는 상처에 가있었기에 내가 모르는 내 몸의 또 다른 상처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

이렇게 나의 첫 하프런은 온통 상처투성이로 영광스러운 얼룩을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2019 SEOUL HALF MARATHON


   

 


마라톤 입문 1년 차

1년간 꾸준히 10km 부분에 참가해오다 용기를 내 한 발을 더 나가보기로 했다

작년에 뛰었던 대회 중 가장 기록이 좋았고 자신감이 붙는 계기가 되었던 '서울 하프 마라톤'에서 첫 도전을 하기로 하고 일찌감치 참가신청도 마쳤다

이 대회를 위해서 지난 한 달간 10km 대회에 두 번이나 나가 연습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도로에서의 달리기 감각과 결심도 마음에 새롭게 다졌다

10km로는 어느 정도 끝장을 봤다고 생각했으나  그 두 배의 거리를 달린다는 건 솔직히 감이 오지도 않았고 걱정이 컸지만 단 한 가지 결심만 다지고 거리에 나섰다



'꼴찌를 했으면 했지 중도 포기는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중도에 포기를 해버리면 다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집으로 도착된 기념티셔츠와 대회 배번


  


하프런을 신청하기까지 1년이 걸렸고 늘 혼자 달리는 나는 대회 스케줄도 내가 파악하고 계획도 내가 짜고 그에 맞춰 연습이나 준비를 하는 것도 나 혼자였다

혼자의 장점이라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하다가 그만둬도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으며 만사가 내 멋대로여도 되는 자유로움이 있지만 반면 뭐라도 얻고 싶다면 스스로 각오를 다지는 수밖에 없다



                   


 


                                                    

대회가 시작되는 광화문까지 남편이 데려다줬고 골인 지점인 상암경기장에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대회 시작은 8시지만 광화문 도착은 6시 반

교통 통제 사정을 고려해 일찍 도착했고 내가 내린 후 남편은 바로 상암으로 출발, 나 혼자 남았다

올해도 작년처럼 광화문의 스타벅스에서 숏 사이즈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도 미리 다녀오기로 하고 오픈도 안 한 스타벅스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줄을 서 커피와 따뜻한 애플파이를 주문했다

근방의 다른 커피가게들은 이보다 일찍 오픈해 이미 손님을 받고 있었지만 어쩐지 가장 컨디션이 좋았던 작년 대회와 모든 과정을 똑같이 진행하고 싶었다




 



출발 직전 인파에 섞여 혼자 쭈뼛쭈뼛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풀었다

10km까지는 작년에 뛰어 아는 코스다

경험이 있으니 그대로 똑같이 달리고 미경험의 세계는 일단 10km를 통과한 후 생각하자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스타트 라인에 섰다

 

5,4,3,2,1


출발!!



환호성과 함께 종종걸음으로 출발 라인을 통과했다

길다면 긴 여정의 시작이다

가슴 벅차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시청을 통과했다

시청을 지나 충정로, 아현, 마포를 지나 마포대교를 건너고 그대로 쭉 내달려 여의도공원 끝에서 턴, 공원을 그대로 끼고 달리면 된다

이 과정에서는 아현동 통과할 때 조금 주춤했던 것 외엔 무리 없이 내 능력껏 잘 뛰었다고 생각한다

마포를 통과해 마포대교를 올라가기 직전 첫 급수대가 나오는데 목이 마르지 않아 통과했다

발이 빠른 편은 아니라서 시간을 벌 수 있는 곳에서 확실히 챙길 필요가 있어 급수대를 그 포인트로 삼았다

첫 급수대를 통과하고 다리 위로 올라섰다

지난 경험으로 슬슬 힘들어 걷고 싶은 마음이 들 때쯤 농악 연주팀이 등장할 것이다


들린다 들려 신나는 연주 소리가


상모를 돌리며 나타난 신명 나는 농악대가 정말 고마웠고 기쁘게 하이파이브를 해줘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팀은 아니지만 거리 곳곳의 응원 크루들을 보며 나 역시 기운을 추스를 수 있었다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에 진입하고 나면 10km 런의 골인 지점에  거의 도착이나 마찬가지지만

이번엔 아직도 3km는 더 가야 겨우 절반을 통과하게 된다니 발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작년 좋은 기록으로 골인의 기쁨을 누렸던 그 지점을 지나 미지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솔직히 기쁘고 한편으로 꽤 겁을 먹었었다


무려 21.0975km다


지금껏 달려온 거리를 똑같이 달리고 2km 정도를 더 얹어야 한다니 걱정 정도가 아니라 사실 엄청 무서웠다

달리다 보면 끝나기는 하겠지

작년에도 느꼈지만 이 대회가 유독 사이사이 연주하는 팀도 많고 기운이 떨어질 즘 힘을 북돋아주는 분들이 많았다

축제 분위기가 많이 나는 재미있는 대회란 얘기다

파스를 뿌려주시는 분들도 촘촘히 자주 만날 수 있어서 할아버지 자원봉사자분께 한 번, 학생에게 한 번 허벅지에 스프레이 파스 서비스도 받았다

(양화대교 올라가는 길목에 비닐봉지에 파스를 싸 들고 혼자 앉아있던 귀여운 학생이 생각난다)


한강 굴다리를 통과할 땐 스피커와 조명을 설치해 쩌렁쩌렁한 음악과 함께 뛰고 있는 러너들의 환호를 들으며 잠깐이나마 시원하고 신나는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양화대교를 건너 다시 마포로 넘어가면서 15km 지점을 통과했다

장하게도 이때까지는 한 번도 발을 풀지 않고 쭉 달려갔지만 이후 마음에 고이 눌러둔 공포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떤 식으로든 달려서 이 정도의 거리를 통과해본 적이 없다 보니 슬슬 다리가 굳기 시작했다

다리가 뻐근해지니 슬슬 무서워졌다


17km를 지났는데 여기서 포기를 한다고?


정 힘들면 1km씩 끊어서 가자

진정한 러너들은 걷기 시작한 순간 이 대회는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이럴 땐 다행히도 새까만 초짜 러너니까 걸어서라도 들어가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걷던 기어 들어가던 누구도 내게 신경 쓸 사람은 없다

막상 걸어보니 어찌나 편안한지 세상 평화는 다 품은 듯했다

하지만 급한 성격이 걸림돌이라 50m쯤 걸으니 마음이 다시 조급해지기 시작해 걸음이 빨라지며 총총 뜀박질에 속도를 붙여 이상한 꼴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앞의 표지판까지만, 다시 저 앞의 나무까지만

걷다 뛰다 반복하다 보니 20km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다 왔다!


없던 힘이 났다


달리자


들어가서 죽더라도 달려보자!!


날아오르는 기분으로 마지막 힘을 끌어올려 발을 내딛는데 발끝에 뭔가 걸렸다

순간 '아!' 하는 사이 중앙 대로를 가로지르는 코스에서 차선 블록에 발이 걸려 붕 떠 날아오르고 말았다

오른쪽 팔꿈치와 무릎으로 쓸면서 슬라이딩

큰 상처가 나고 말았다

정말 당황스러웠고 넘어졌다는 충격도 충격이지만 주목을 끌고 나니 창피함에 몸이 아픈 것도 몰랐다

함께 달리던 주변 러너들이 일으켜주고 도움을 주셨다

골인과 기록 측정이 코앞인데 달리던 힘든 걸음을 멈추고 도와주셔서 진심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통증이 찌릿찌릿하게 올라왔다

길에서 넘어진 게 얼마 만인 지도 모르겠는데 그만두기에는 아쉽게 골인이 목전이다

피는 들어가서 닦기로 하고 일단 다시 달렸다

엎어지는 걸 보셨는지 앞에 응원하던 분들도 파이팅이라고 콕 짚어 외쳐주셔서 창피의 힘으로 도망치듯 달려 골인



02:07:06



내 첫 하프런의 공식 기록이다

정말 가지고 싶었다





 




 끝까지 달려온 내가 기특하고 귀여워 잘했다고 스스로 격려하고 토닥이며 주변을 둘러봤는데 평소에는 골인 지점에서 요란스럽게 응원하던 남편이 안 보였다

혹시 골인 지점을 모르나 싶어 전화를 걸었다


"어디여"


"그러는 닌 어딘데"


"난 들어왔는데"


"진짜? 벌써?"


첫 참가였고 내가 별로 빠르지 않다 보니 평소 농담처럼 2시간 반 안에 들어오겠단 말을 주고받았는데 이 양반이 거기에 맞춰 천천히 오다가 내가 생각보다 일찍 들어왔다는 것과 직전에 넘어져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매니저 모드로 달려와 상처를 봐줬다

넘어져 다친 상처보다 달리는 중이라 몰랐던 발의 치료가 급했다


장거리 달리기에서 신발이 발에 딱 맞지 않거나 내리막길에 속도를 붙여 뛰다 보면 마찰로 상처가 생긴다고 하는데 첫 장거리 러닝에 놀란 발가락들끼리 부딪혀 살갗이 찢어져 양말, 신발을 피에 푹 적실만큼 큰 상처가 났고 반대쪽 발가락은 발톱에 피멍이 들어 검은 옥수수처럼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다친 것보다 이 지경이 됐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보다 큰 고통과 극기를 달리는 중 느꼈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조선일보 주최 대회라 행사로 미스 트롯 파이널 진출자들 공연도 있고 보고 놀 것도 많았지만 첫 장거리의 피로도가 높아 집에 가자고 빠져나와선 청라의 단골 짬뽕집에 들러 뜨끈한 짬뽕에 참이슬을 한 병 마셨다

                       




땀이 식으면서 두 시간 동안 경험했던 첫 하프의 이모저모가 눈앞에서 춤을 추듯 지나갔다

피투성이로 골인했지만 경험은 오롯이 내 것이고 이 성취감도 나만 느끼는 단독 감정이라고 생각하니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짬뽕도 사주고 소주도 사 먹인 남편은 동네 약국에서 연고와 멍 빠지는 약을 사 하루 종일 챙겨 발라주며 걱정을 했지만 난 그저 기분이 좋아 헤헤거리다 잠들었고 쟤가 피곤한 데다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하던 남편도 나와 함께 깊고 오랜 낮잠에 빠져들었다


                      


첫 하프 완주 기념 메달

 


                                              

자고 일어난 후에도  이날의 러닝에 대한 복기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는데

첫 하프 러닝을 마친 감상이라면 분명 끊지 않고 들어올 수 있었는데 겁을 먹었다는 아쉬움이고 그럼에도 납득이 가고 이해되는 부분은 운동 부족이라 진정한 완주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평소 운동을 충분히 하지 않아 준비가 부족하다 보니 다리의 힘이 빠지는 지점이 있는데 나는 이겨내지 못했다

이 거리는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력이 필요하다

근성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빠르지 않아도 된다면, 내가 정한 데드라인을 지킬 수 있다면 모두가 내 앞을 지나가도 괜찮고 꼴찌로 골인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년에도 똑같은 길을 달리게 될 테니 그때에 대비해  코스를 마음에 새겼다

이 마음이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쌓이다 보면 평정을 찾고 자신만의 러닝을 끝까지 하는데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까

참가자 모두가 다 숙련된 러너일 리 없다

 초짜 없고 혼자 참가한 사람이 나밖에 없을 리도 없다

그리고 혼자라도 길에 나서면  뛰는 동안은 동료가 된다

내가 넘어 지거나 숨 가쁜 상황이 돼도 손을 내밀어 줄 누군가가 분명 있다

그러니 다음에도 위축되지 말고 달려보자

보폭이 조금은 넓어진 것 같아 충분히 행복했던 대회였다



                         


작년에 참가했던 같은 대회의 10km 완주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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