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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러너 Jun 05. 2019

42.195 마이런

달리기 1년 차 / 10km에서 풀코스까지(2)

책상 의자에 양반다리로 올라앉아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별일도 아닌데 심장은 쿵쿵대고 핏기가 빠져나간 듯 차가운 손가락 끝이 간지럽게 살살 떨렸다



눌러! 엔터!!




나 스스로 마라톤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던 순간이다


소극적이고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의식되고 창피해 동네 한 바퀴도 제대로 못 달리는 내가 대회에 나가겠단다

그것도 10km 부분에



당시의 내 운동 상태는 일주일 서너 번

헬스장의 러닝머신으로 10km 정도를 걷거나 뛸 수 있는 정도였다

막연히 대회에 나간다면 5km는 완주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품었을 만큼 워낙에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숨겨진 재능 같은 것도 없다는 건 내 기록을 보면 누구나 바로 수긍이 갈 것이다



체중이 불어서 운동은 해야겠고 잘할 수 있거나 좋아하는 건 없고

이때 모두가 선택하는 운동


'걷기'를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운동장 트랙 산책


처음엔  천천히 걸었는데 성격이 급하다 보니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성큼성큼 보폭 큰 걸음으로 팔을 휘휘 저으며 열심히 한 시간쯤 걷고 난 후의 워밍 된 몸 상태가 굉장히 기분 좋았다

결리고 답답했던 근육이 시원하게 풀린 느낌이랄까

점점 걷는 게 즐거워졌다


걷다 보니 짧은 구간은 가볍게 달리기도 했다

그래 봐야 100m

100m는 걷고 100m는 달리기를 반복했다

익숙해졌다 싶을 즈음 이번엔 200m씩 걷고 달리기를 반복했다

5km 정도를 그런 식으로 반복했다

이때만 해도 운동을 제대로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어서 청바지 입고 나갔다가 조금 달릴 때도 있는 정도의 운동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활동이었다


좀 더 모양새를 갖춰볼까

아웃렛에서 편한 운동복을 한 벌 사고 이사 2년 만에 아파트 피트니스센터에 처음 내려가 봤다




세상에

할머니들이 젊은 나보다 훨씬 잘 걸으시고 폼나게 운동을 하신다




달릴 땐 러닝 전용 러닝화를 신어야 한다고 해서 신발을 검색해보다 알았다

그간 예쁘다고 신고 다녔던 내 패션 운동화가 사실은 러닝화였다는 것을




뭐든 시작이 어렵지 한 번 시작하면 꾸역꾸역 하기는 한다


감기몸살에 걸렸을 때도 찌뿌둥하다고 내려가서 한 시간의 걷기 운동시간을 채웠다


달리기에 적응이 되어 걷다 뛰는 반복이라도 한 시간 정도는 유지를 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직접 거리에 나가 달려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꽂혀 대회를 검색하다가 가장 가깝게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덜컥 참가 신청을 내고 말았다



서울 국제 마라톤






이 대회가 그렇게 명성 높은 대회인지 몰랐다


얼마 전 이 대회가 '세계 육상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기사를 보고 비록 10km를 달릴 뿐이지만 내가 2년 연속으로 참가했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도 했다



'내 첫 대회는 바로 국내 3대 마라톤 중 하나라는

서울 국제마라톤이다'



대회 당일은 인산인해의 축제 분위기에 압도당해 꽤 풀 죽어 있었다

일행도 없이 덩그러니

아웃렛에서 산 평소 입는 운동복 차림으로 그 복잡한 올림픽 공원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있다니

무슨 용기가 나서 거길 간다고 했을까


긴장되어 몸도 못 풀고 있는 사이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다


5, 4, 3, 2, 1


출발!!





처음으로 받은 마라톤 대회 기념 티셔츠와 배번


처음엔 사람들을 따라 밀리지 않고 치고 나갔다

첫 참가 대회다 보니 길에서 달릴 수 있는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긴장감에 다른 사람들처럼 달렸던 것 같다

2km 지점을 조금 못 지나 걷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솔직히 마음이 놓였다

실제 슬슬 숨이 차오르고 정강이가 당겨 걷고 싶단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10km 부분의 코스는 올림픽 공원을 출발한 직후가 완만한 경사길이라 초보가 아무 생각 없이 전력으로 달렸다간 일찍 퍼지기 딱 좋은 티 안나는 주로이기도 했다


결국 3km 조금 지난 지점에서 걸음을 늦춰 이후부턴 걷다뛰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직 내게 5km는 공포가 남아 있는 거리였다


티 안 나게 걷뛰하는 사이 급수대에 도착했다

목마르지 않았어도 물을 마셨다


절반인가


첫 도전의 10km는 멀기만 했다

평지 주로를 따라 달려가는데 롯데 월드 타워가 으리으리하게 눈앞으로 다가왔다

뭐랄까

반지의 제왕에서 봤던 사우론의 눈이 박힌 탑을 보는 기분이다

(그 타워가 워낙 그렇게 생겼다)

교통통제로 러너의 거리가 된 그 길을 내가 달리는 날이 올 줄 정말 몰랐다

힘든 것과 별개로 감동을 받아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내가 그런저런 감상에 빠져 주변을 기웃거리거나 걷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 이미 한 시간을 훌쩍 넘겨 버렸다


잠실역을 지나 잠실새내 역을 통과했다

이 구역이 8km대를 지나는 지점이었는데 이미 기록에 대한 의욕을 잃은 나는 진심 마음 편하게 산책 레이스를 펼치고 있었다

거리를 다른 사람들과 섞여 달린다는 것은 혼자서 동네를 10km 편하게 뛰어봤다거나 러닝머신을 편하게 한 시간 뛰어봤다는 느낌과 비교가 안 되는 긴장과 쾌감이 있었다

평소 생각 없이 지나다니며 교통 체증에 짜증을 내던 그 길에 내가 서있다는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희열에 감격하는 사이 9km 지점을 통과했다

이제 곧 도착이다


나의 첫 10km 레이스의 끝이 보인다




나는 첫 대회, 첫 피니시 라인을 1:04:25에 통과했다








 1년 후 똑같은 대회, 같은 코스의 10km에 재도전했다

겨울 내내 쉬기도 했고 봄을 맞아 달리는 첫 대회라 1년 전 못지않은 긴장과 설렘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 대회의 2회 차, 한 번 뛰어봐서 아는 길이라는 보험을 장착했을 뿐



출발!



이번엔 작년과 달리 천천히 출발했다


'오버런의 교훈은 1년간 여기저기서 체험했으니 오늘은 천천히 가자'


같은 길을 다시 달리자니 감격의 마음이 새록새록했다

지난가을 춘천 이후로 대회에 처음 나왔고 겨울 내내 여러 이유로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었다


달릴 수 있을까


걱정과 달리 편안하게 5km 지점을 통과했다

지난 경험에 따르면 물을 마시지 않았어도 달리는데 지장은 없었다

올해는 10km 코스를 달리는 동안 물을 마시지 말자

집중을 깨지 말고 그대로 달려 골인하자


그다지 더운 계절도 아나라 물을 건너뛰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작년엔 발아래만 보고 달리느라 몰랐던 주변 경치나 스쳤던 가게의 간판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연습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이런 달리기가 가능하다니


내 달리기는 지난 1년의 경험을 딛고 스스로 성장했나 보다


마지막 2km는 좀 숨찼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올해의 첫 피니시 라인 통과!!

00:58:46


기록과 별개로 과정이 좋았다

힘들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쉼 없이 달리기만으로 얻어낸 기록이었다


이게 가능하구나


좀 더 먼 장거리의 꿈을 꾸게 됐던 첫 순간이었다





올해는 작년에 뛰었던 대회에 다시 참가하고 코스를 답사하며 작년과 올해의 다른 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프 코스에 도전하기 위해 준비로 10km 대회를 두 번 나갔고

풀 코스를 위해 하프 코스에 두 번을 나섰다

굉장히 서둘렀고 준비가 부족한 것은 나도 잘 안다

다만 실전처럼 밀어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다

밥도 술도 맛있어서 살이 올라 좀 걸어볼까에서 시작한 운동이 짧은 달리기로, 꾸준한 러닝머신 운동으로, 다시 동네 한 바퀴 달리기에서 용기를 내 대회 신청까지

10km에서 하프로, 하프에서 다시 풀코스,

기록은 별 볼 일 없어도 1년 만에 풀코스를 두 번 완주해냈다

내게 이런 집중력이 있다는 점이 뿌듯하다


기록의 문제는 지금부터 보완하면 된다

지금은 '거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 한 상태까지는 왔다


스스로 성장하고 있는 내가 그저 기특할 따름이다



서울 국제 마라톤의 작년과 올해 10km 부분의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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