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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러너 Jun 07. 2019

42.195 마이런

폭염의 달리기

이 대회에 왜 나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여름이라 대회도 뜸할 때였고 참가비도 저렴했으며  집에서 멀지도 않아 덜컥 신청을 해버렸던 게 아닐까




인천 광역시장기 건강 달리기 대회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2018년 7월 22일

인천 송도에서 열렸던 대회였다

 혹서기의 건강 달리기라니 오히려 건강이 나빠져 돌아오는 게 아닐까

대회 신청은 기온이 오르기 전 쾌적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짧은 생각으로는 한여름의 초록 초록한 오전을 상큼하게 달리는 건강한 사람(누가?)의 싱그러운 이미지만 머리에 가득했다

게다가 바다가 가까운 동네 아닌가

즐거운 생각으로 싱글벙글 대회 참가 신청을 하면서도 이 해가 기록적인 폭염을 기록할 기억에 남을 여름이 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 못했다



대회를 앞두고 아직 7월의 중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뉴스에선 연일 여름 기온으로는 신기록 경신이라던가

시뻘겋게 불타는 일기예보용 지도를 보여주며 안타깝지만 진짜 여름은 이제부터라고 겁을 주고 있었다

 실제로 잠 설치는 열대야의 밤, 끓어오르는 한낮이 반복됐다

'숨이 턱턱 막힌다는 느낌이 이런 거였어'


이런 날 달려도 되는 거냐고 걱정하는 남편에게 문제없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글쎄..

일단 운동복을 챙겨 입고 대회가 열릴 송도로 향했다

별 생각도 계획도 없이 나갔던 나와 달리 고수의 분위기를 풍기는 러너들이 대거 참가한 듯했다

 대회가 자주 열리는 계절이 아니다 보니 대회 감각을 유지할 겸 참가를 많이 한다고 했다

물론 나는 특별히 목표가 있다거나 꼭 달려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마라톤의 비수기라는 여름에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대회에 나서게 됐다




시작은 어수선했지만 얼마 전 당선된 새 인천시장의 개회사와 함께 대회가 시작됐다

코스는 송도의 한적한 도로였고 교통통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구간이었지만 안전요원과 다른 10km 대회보다 급수대가 자주 배치되어 있는 점등의 배려가 느껴졌다

문제는 오전 9시 출발 직후부터의 오전 햇빛이 범상치 않았다는 점이다

일단 뜨거운 데다 아직 채 식지 않은 아스팔트가 다시 데워지며 열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위로도 찌고 아래로도 찌고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땀이 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조금이라도 나무 그늘로 숨어들고 싶어 인도로 붙자니 정말 신경 쓰이는 게 있다

나무 아래가 온통 새똥이다

갈매기들이 똥 싸러 들르는 화장실인가

새도 싫고 새똥은 더 싫은 나로서는 그냥 땡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 녹아서 아스팔트에 엉겨 붙어 버릴 것만 같다



4km 조금 못 가서 이 레이스는 포기하기로 했다

더 뛰었다간 급사할지도 몰라


내 생명이 소중했던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어디 주차장의 시원한 차 안에서 쉬고 있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대회 중인데 전화가 걸려오니 남편도 깜짝 놀라 전화를 받았다


나 그만 뛸래


갑자기 전화를 하니 어디 다쳤냐고 놀라서 묻는데 힘들어서 못 뛰겠다고 했다

다만 그 코스가 후미진 뒷길로 공사 예정지와 수풀이 우거지거나 한 면은 바다인 애매한 위치였다


포기한 사람들 태워가는 차가 있어

안전요원 보이면 차 탄다고 하고 얻어 타고 와



보통 앰뷸런스나 대회 행사 차량이 중도에 달리기를 포기한 사람들을 태워주는데 이 날은 그것도 안보였다

잠깐 걸으며 차를 찾는데 저 앞에 급수대가 보였다

저기까지만 가볼까

잠깐 달려가 물을 한 컵 마셨다

살 것 같았다


회복된 힘으로 또 잠깐 뛰어봤다

곧 5km 반환점인데 괜찮을 것 같기도 해서 조금 더 가보기로 했다

걷다 뛰다 하며 반환점을 도는데 행사 관련자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옆의 사람에게 하는 얘길 듣고 말았다



마라톤인데 걷는 사람이 있네요?



하필 저를 보신 겁니까



이 날은 나만 걸은 게 아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지친 모습으로 땀을 뚝뚝 흘리며 떼 지어 걸어서 들어갔다

반환점을 통과하면서 걸어서라도 들어가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지만 걸음이 무겁고 타들어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온의 쨍쨍한 아침

그렇게 힘들게 피니시라인을 통과했다

기록은 볼 것도 없지만 어쩐 일인지 한 시간 안으로  턱걸이에 성공했다

(이 코스의 실제 거리가 9km가 조금 넘는 정도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들어가자마자 물부터 받아 미지근한 생수로 목을 축였다


나 완주했다


꾸역꾸역 완주했다는 소식에 남편은 기가 막힌 듯 딱 한마디 했을 뿐이다



독한 것



보통 완주 후에는 간식 봉투를 받는다

주스, 바나나와 초코파이, 그리고 빵 종류가 하나 정도 들어있는데 여긴 따끈한 김치 순두부를 한 사발씩 나눠줬다

이 날씨에 솥을 걸고 순두부를 끓이다니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시뻘건 얼굴로 순두부를 먹었다

그리고 기념품으로 막걸리를 한 병 받았다


많이 독특하다


막걸리병을 옆구리에 끼고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징그러운 햇빛이 집요하게 내 정수리만 쫒는 것만 같았다



보긴 그래도 꿀맛이었음


'인천 소성주'라는 지역 막걸리였는데 한 번 마시고 꽂혀서 이후에 몇 번이나 더 사 먹었었다


달리기를 잘해서 입상권에 들면 쌀도 주고 고기도 주고 강화 마라톤은 새우젓도 준다던데 생계형 부식 벌이 마라토너가 되어볼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가 어느 눈먼 쌀과 고기와 새우젓이 내 품에 들어오겠나 싶어 바로 포기했다


이 날은 죽을 것 같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조건이 혹독하기는 하지만  은근 매력 있는 대회라는 생각이 들었고

1년이 지나 그날의 고통을 깜박 잊은 나는

 올해도 나가겠다고 덜컥 참가신청을 내버렸다

그래 뭐 있나

있는 힘껏 달리고 막걸리 마시고 자버리면 되지

이런 달리기라면

더위를 정면으로 통과하는 여름의 이벤트로 충분한 즐거움을 안겨줄 것 같아 올해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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