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라도 마라톤
인생의 반전을 마라톤에서 꿈꾸다
풀코스 마라톤을 뛰어 보면 어떨까
발칙한 첫 상상은 겨우 10km 완주가 가능할 무렵 시작됐다
스스로 마라톤 대회를 검색하고 선택해 대회에 나가기 시작했을 당시 내 달리기의 끝은 10km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더 달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내 결과에 만족하고 당분간 비슷한 대회를 드나들며 한 시간 안팎의 완주 기록을 뿌듯해하는 허세를 누릴 생각이었다
일단 하프코스만 하더라도 10km의 두 배가 넘는 데다 달리는 과정이 굉장히 지루할 것 같다는 선입견도 있던 터라 직접 달릴 생각도 달리는 사람이 부럽지도 않았던 전혀 상관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하프코스도 아닌 풀코스 달리기에 대한 관심이 처음 싹텄던 계기는 피겨선수였던 아사다 마오가 은퇴 후 하와이 호놀룰루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아주 작은 기사를 접하면서 였다
운동 선수였다고는 해도 마라톤 대회의 풀코스라니 참신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녀의 기록이 마음에 돌을 던지듯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4시간 35분
한다 하는 선수도 저런 기록이 나오는구나
그럼 4시간 반이 넘는 동안 계속 달리는 상태였다는 건가
만화에서처럼 '피겨선수가 마라톤 대회에서 고통을 극복하고 순위권으로 완주했다' 이런 내용이 아니라는 현실적인 부분에 끌렸다
실제 이 대회에서 그녀는 3000등 안에 턱걸이를 했다는데
만년 2위의 분루를 숨기지 않던 스타 선수의 평범한 성적은 풀 마라톤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막연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뇌가 조여 오는 42km의 달리기라니
상상을 하게 됐고 상상은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나도 달려보고 싶다
순수하게 달려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풀코스 완주에 대한 계획에 시동을 걸었다
물론 내 능력치는 내가 잘 알기에 그저 상상만 하는 것으로는 곧 관심이 시들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빼도 박도 못할 계획 세우기에 돌입했다
해외 마라톤 참가
해외의 대회에 나가는 거다
허황된 계획일 수도 있으나 한번 다른 나라의 마라톤에 꽂히니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 별 거 있나 가자 가보자'
돈들이고 공들여 외국까지 가서 10km 뛰고 하프 뛰자니 뭔가 뛰다 마는듯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잠깐 두려움에 망설이긴 했지만 역시 처음 계획대로 풀코스를 뛰어야겠다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느림보의 도전 선언
앞으로 대단할 패기있는 첫걸음이었다
시작이 반이라더니 벌써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땐 가까웠으나 지금은 멀어진 나라를 첫 도전지로 삼았다
홋카이도의 여름 마라톤
5시간의 제한 시간 내에 들어가 메달을 받는 것이 목표였고 대회 신청이 2월 중에 있어 아직 올해는 국내에서조차 어떤 대회도 나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어찌 보면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지 않나 싶은 허황된 큰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이후 봄의 동아마라톤과 인천 하프에서 10km를 완주한 이후 꾸준히 여러 대회에 나가게 됐는데 풀 마라톤은커녕 하프마라톤도 뛰어보지 않은 상태였으면서도 자신감만은 하늘을 찔렀다
할 일이 있고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매번의 달리기가 굉장히 즐거웠다
풀코스에 나가기 위해 하프코스 마라톤에 참가했고 목표로 한 대회에서 잘 뛰기 위해 국내의 풀코스 마라톤에도 참가했다
10km에서 하프코스로 넘어오면서 마라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 것 같다
10km를 우습게 봐서가 아니라 거기까진 즐기는 마음 하나로 완주가 가능했는데 하프는 좀 달랐다
달리는 사람들의 실력차가 컸던 것은 물론이고 이들은 꾸준히 그리고 진지하게 달리고 있는 티가 났다
그 사이의 내 실력은 정말 하찮고 갈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밀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진해서 기꺼이 운동화를 꺼내신고 공원으로 뛰러 나가게 됐다
한때는 이러다 말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갈수록 진지해져서 폭염의 계절에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고 목덜미도 팔도 다리도 단단하고 건강하게 익어갔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 장거리 달리기도 기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시작을 하고 봤지만 반복되는 실패에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 스스로 테스트를 해보게 됐다
팔을 흔드는 방법에서 다리를 놓는 방법까지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운동을 글로 읽고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자세가 정말 웃길 때가 있는데 한심하게도 난 늘 우스꽝스러웠다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유튜브의 세상에 살고 있음에 굉장히 감사하는 계기가 됐다)
흔히 달리기는 무릎 통증을 야기하거나 증상을 악화시킨다고 생각한다
내가 마라톤을 시작했다고 했을 당시 친구가 했던 첫마디도 "우리 나이에 뛰면 무릎 나가"였고 TV 소화제 광고에 등장하는 멘트도 "뛰면 무릎 나가"였다
(소화가 안된다고 달리지 말고 소화제를 먹으라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아직 무릎은 멀쩡하다
정확히 짚자면 아직 무릎이 나갈 정도로 달려보지 못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니 어떤 내용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무조건 무릎에 나쁜 운동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운동을 시작한 데는 멀지 않은 미래의 건강에 대한 대비가 포함되어 있었다
40대의 여자이고 그동안 운동은 관심도 없었고 다가올 폐경기와 노년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있다
엄마는 40대 후반부터 관절염으로 병원을 다녔고 이후 이런저런 노년기 잔병으로 아직도 고생을 하고 있다
결혼과 독립이 늦어져 부모와 비교적 오래 살았던 나는 사람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어떤 걱정을 하고 어떤 면에서 삶의 질이 떨어지는가를 지켜볼 수 있었는데 결론은 <건강>이었다
엄마도 뒤늦은 깨달음이 있었는지 매일 오래 걷고 종교활동과 봉사활동을 하고 친구들과 함께 여행도 다니며 늦게나마 취미를 통한 몸과 정신의 건강을 챙기기 시작했고
심지어 치매 예방 차원으로 불경을 외워 베끼는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것도 매일!)
그에 비해 아버지는 뼈가 단단한 사람이고 잔병이 없으며 젊어 한 때 매일 달리기를 즐겼었다
(반면 끈기가 부족해 곧 그만뒀고 그 과정도 내가 다 지켜봤다)
몸이 튼튼한 아버지와 정신력이 강한 엄마 사이에서 내가 나왔다
지금부터 운동으로 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한다는 불안은 엄마한테서 나왔고 잘하진 못해도 이 운동이 가능할 거라는 자신감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거나 다름없다
마라톤과 무릎 통증의 상관관계에 대한 막연하고 불편한 인식은 오해라는 내용이 이미 나오긴 했지만 부상이 아주 없는 운동이 있을 리 있겠는가
달리는 중 얻은 다리 통증으로 병원도 가봤지만 운동 중에 오는 흔한 근육통일 뿐 큰 이상은 없다는 진단을 받고서야 마음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내 입장에서는 다리가 잘려나갈 것 같은 통증이었지만 이상이 없다니 안심이다)
인간의 연골이라는 건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고 그를 대신할 수 있도록 무릎뼈 주변의 근육을 튼튼히 해 보호해야 한다는 건 건강 프로그램에서 보고 배운 얕은 상식이지만 충분히 납득이 되는 내용이었다
폐경기의 운동으로 걷기를 추천하는 글도 많이 봤다
폐경기 자체가 슬프지는 않지만 정신의 영역은 또 다른 문제일 수 있으니 이것 또한 미리 준비해 보기로 했다
꾸준한 달리기는(혹은 조깅 정도의 운동이라도) 분명 중년의 건강한 생활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목적이 있으면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배가 된다
가족과 함께 혹은 커플이 함께 뛰는 흐뭇한 장면을 대회에서도 꽤 자주 봤다
자녀가 있다면 자녀와의 추억이 될 함께 달리는 5~10km 대회도 좋고 부부가 함께 사이좋게 달리는 대회도 좋고 나이 드신 부모님과의 추억을 위해 건강 걷기 대회에 함께 참가하는 것도 이 운동의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나는 자녀도 없고 남편이 운동을 싫어하며 부모와는 별다른 활동을 하고 싶지 않은 쪽이지만 이럴 땐 홀가분하게 혼자 달려도 충분하다)
달리기의 또 다른 장점이라면 그 흔한 준비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하게 말해 몸뚱이 하나면 시작은 가능하다
나도 처음엔 청바지에 맨투맨, 신던 신발로 두 달을 달리다 투자해볼 만하다 싶어 졌을 때 운동복도 사고 운동화도 새로 샀다
전문 운동선수도 아니고 처음은 다 그렇지 않을까
조금 오른 체중이 걱정스러워 걷다가 걸을만하니 달리기 시작했으며 달리기가 좀 된 다 싶어 대회를 나갔고 달리는 코스를 늘려나가며 다음 코스의 꿈을 꾸게 됐다
달리다 보니 이것도 운동이라고 필요한 장비가 생겼고 하나씩 갖추며 외형상의 러너가 완성되었으며 약간의 통증과 크고 작은 부상도 안고 가게 됐다
달리기가 무릎에 나쁜 운동이라서가 아니라 운동을 하다 보니 다리에 통증이 생겼을 뿐이며 그 정도는 치료나 달리는 자세 교정, 혹은 훈련으로 극복이 된다고 한다
처음부터 쉽고 바로 이루어지는 운동이 세상에 있긴 할까
홋카이도 마라톤 완주를 위해 여름 내내 연습 달리기에 열을 올렸다
매일 반복해 달리던 주로에 대한 추억과 정이 생겼고 한 걸음 한 걸음을 가며 고민했던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홋카이도 마라톤을 다녀오고 나서 두 번의 풀코스와 한 번의 하프에 나갔다
풀코스 한 번은 포기하면서 하프 코스로 셀프 변경해 들어왔고 한 번은 5시간 대회를 5시간 7분으로 완주, 그에 비해 부담이 적은 하프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여유 있게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기록이 좋던 나쁘던 지금은 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젠 발을 뺄 수 없는 부분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 인생에 이만큼 역동적인 순간이 있었을까
몸을 쓰는 인생이라는 건 생각도 못했는데 지금도 나는 운동 근육통을 느끼며 글을 쓰고 있다
(이 근육통은 달리기가 아니라 너무 오래 걸어서 생긴 종아리에 알배기는 통증이다
뛰어서 아픈 부위와 걸어서 아픈 부위가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가 꿈꾸는 내 미래, 내 노년은 건강한 근육으로 나이에 비해 늦지 않은 시간으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는 것이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서 노년의 러너를 숱하게 봐왔다
'무너진 저 폼으로 완주가 가능할까'
다리를 끌 듯 달리던 허리 굽은 러너들이 나보다 먼저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다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아직 나는 거죽만 멀쩡한 준비 안 된 달리기 주자에 불과하지만 앞으로의 목표는 하나
"똑바로 잘 달리자"
무리한 욕심은 없다
내 목표는 그저 앞으로도 꾸준히 달릴 수 있는 <행복한 달리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