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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러너 Aug 29. 2019

42.195 마이런

다시 풀코스를 완주하다 / 2019 홋카이도 마라톤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햇빛이 따갑다

공들여 바른 선크림은 진작에 비에 씻겨 내려갔고 양말은 스민 빗물에 젖어 바닥이 운동화에 딱 달라붙었다

다행히 8월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진행 중이던 나의 세 번째 풀코스 마라톤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제한시간인 5시간에 간당간당하게 맞춰 성공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기록체크 구간인 40km 부분을 통과했다

앞으로 9분 안에 들어가면 성공이란다

걸을 힘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멀리 피니시라인이 눈에 들어오니 허벅지에 힘이 돌았다


진짜 다 왔다


'끝났다

5시간을 달려 드디어 저 선을 넘는 거야'



넷타임 4시간 53분 7초

대회기록은 4시간 58분 59초로 정말 딱 제한시간에 피니시라인을 통과하며 특별한 의미를 둔 세 번째 풀 마라톤의 완주를 무사히 끝냈다






홋카이도 마라톤

北海道マラソン2019



올해 초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해보겠단 결심을 하고 여러 대회를 검색한 끝에 이 대회로 낙점

마음 바뀌기 전에 바로 참가신청까지 끝냈다

해외 대회의 선택에 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좀 더 동기부여를 하고 자극을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달까

당시는 10km 이상을 달려본 적이 없어 막연한 상상으로도 42.195라는 거리가 얼마나 가야 끝나는 거리 인지도 가늠이 어렵던 때였고 멋모를 때 겁 없다고 덜컥 이 대회에 나가보겠다고 패기 있는 선언을 해버렸다

10km에서 풀 마라톤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꽤 노력이 필요했고 반년 간 이 대회를 위해 10km에 두 번, 하프에 세 번 나갔고 풀코스도 두 번 나가 공포에 미리 익숙해지는 끈기를 발휘했다

사실 풀은 커녕 하프도 처음이라 넘어지고 발톱 빠지고 쏠려 피 터지는 모든 경험을 골고루 단시간에 해치우면서 성장해왔다고 생각한다

앞서 두 번의 풀코스 완주는 사실 뛰었다기보단 스스로 발목을 붙잡고 질질 끌어 피니시 라인안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데  넉넉히 여섯 시간제한의 경기를 골라 나갔고 나란히 각각 5시간 5분, 6분의 기록을 냈었다

하찮은 성적이지만 내겐 나름 소중한 완주의 기록이라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는

'잘하면 될 것도 같은데'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부풀기도 했다


해외 대회라 들뜨고 신났던 건 없었고 어떻게든 완주해 보겠다고 몇 번이나 돌려봤던 코스 동영상을 떠올리며 이미지 러닝에 집중을 쏟아부었다

어차피 기록을 위한 러닝은 아니다

즐기는 달리기였고 완주에 목적이 있으니 조바심을 버리고 페이스에 맞춰 천천히 적어도 지난번보다는 나은 달리기를 하기로 했다



 대회 전날 삿포로에 도착해 바로 접수처인 오도리 공원으로 달려갔다

집으로 참가 준비물이 도착되는 국내 대회와 달리 직접 접수처로 가 등록을 하고 배번과 기념티셔츠, 기록칩,  팸플릿 등을 챙겨야 했다

굿즈샵에서 마음에 드는 기념티셔츠 한 벌도 따로 구입했다

개인 취향으로 셔츠 뒤에 코스가 프린트된 다지인을 좋아해 망설임 없이 골랐고 대회 기념 티셔츠는 애초부터 남편의 사이즈로 신청해 커플티를 만들었다




새 옷도 마음에 들지만 이번 대회에 입을 옷은 미리 준비해 갔다

국내 마라톤 대회에서 받은 티셔츠에 태극기 패치를 박아 우리만의 러닝 티셔츠를 만들었고 이 옷이 부끄럽지 않게 꼭 완주해 들어오겠다고 다짐을 했다


대회는 오전 9시 시작

기후가 서늘해 일본에서 유일하게 열리는 여름 대회라는 취지에 걸맞게 오전 공기는 상쾌 그 자체였다

미리 옷을 입고 가볍게 숙소를 나섰다

공원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는 누가 봐도 오늘 대회의 참가자인 여러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어 심장이 뛰었다

스스로 초대해 이 자리에 섰으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그 마음뿐이었다


남편과 공원 인근의 도토루 커피숍에서 커피를 곁들인 모닝세트를 먹었다

각자의 루틴이 있겠지만 내 경우는 숏 사이즈의 커피 한 잔, 그리고 빵을 약간 먹어두는 편이 좋았기 때문에 굳이 커피 가게를 찾아갔었다

참가 인원의 규모가 지금껏 내가 나갔던 대회들과 달랐다

그 많은 사람들이 놀이동산의 축제에 참가한 듯 즐겁게 섞여 각자의 기념을 남기고 있는 모습을 보며 기분이 슬슬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풀코스는 A에서 G그룹까지였고 나는 E그룹에 속해 있었다

순차 출발이니 적어도 5분 이상은 늦어질 거라 계산했다

그나마 커피를 마신 대신 줄을 늦게 서 그룹의 후미에서 출발하게 됐다

출발 직전까지는 남편이 함께 있어줬는데 출발 라인을 벗어나기 직전 빠지며 내게 잘 다녀오라 기운을 불어넣어줬다

빨리 돌아와 다시 만나고 싶다

뛰는 동안 몇 번이나 생각날 만큼 의지가 되어줬던 남편이 정말 고마웠다





드디어 출발

 

인산인해로 인한 체증은 풀릴 기미가 안보였다

듣기로는 이 상태로 2~30km를 가야 된다던데 쉬엄쉬엄 묻어갈 생각에 마음을 느긋하게 먹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게 오히려 잘됐다 싶기도 했다

출발 후 2km를 지날 때쯤이면 당일의 컨디션에 확신이 서는데 이날은 더없이 깔끔했다

 참가 인원이 많다 보니 기록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컨디션만큼은 정말 최상이었다

10km를 통과할 때까지 소나기도 두어 번 맞으면서 다음엔 앞을 가려주는 얇은 모자를 사야겠단 생각을 했는데 역시 직접 달려봐야 정말 필요한 것과 버려야 할 것의 판단이 서는 것 같

일본의 대회는 우리와 약간 차이가 있어 12.1km의 펀런과 풀 마라톤으로 나뉘게 되고 10km 정도를 지나면서 코스가 갈렸다


자, 더 멀리 가보자


파워젤을 세 개 챙겼는데 8km 지점에서 첫 번째 젤을 먹었다

이런 게 도움이 되겠어?라고 생각했는데 꽤 도움이 됐다

일단 평소엔 줘도 안 먹을 미지근하고 달짝지근한 젤이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단 맛이 들어갔단 사실만으로도 한동안 잘 달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입가심을 하려고 일부러 급수대 가까이에서 먹었는데 젤과 물만으로도 순간적인 포만감이 느껴졌다

젤 한 포 당 8km 정도의 효과를 본 것 같다

단 맛이 들어가니 음료나 먹을 것 생각도 덜 났다

응원과 호응의 소중함도 이번에 제대로 배웠다

내 순서쯤이면 후미라고 봐도 무방한데 주로 어디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의자를 자기 집 앞에 펼치고 앉아 구경하며 손 흔들어주는 분들, 개인의 테이블을 펼쳐놓고 음료나 파스를 제공하거나 물을 뿌려주는 분들도 계셨다

'시오스이카 塩スイカ'라는 생소한 단어가 있는데 의미는 말 그대로 '소금 수박'이다

19km 지점을 지날때 쯤 낚시터 테이블 같은 것을 펼친 동네 주민이 수박을 건넸다

수박을 먹기 좋게 자른 후 입자 고운 소금을 뿌려 제공하는 민간 자원봉사인의 서비스였다

굉장히 맛있어서 집에 가서도 꼭 소금뿌려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25km를 지나는 지점부터는 개인 테이블의 도움이 절실했는데 뿌리는 파스, 준비해 간 파워젤이 부족해 거리에서 나눠주는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집에서 가지고 나온 매실절임도 나눠주고 토마토, 초콜릿이나 얼음에 담근 콜라도 아낌없이 나눠주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받아서 먹고 마시고 뿌리면서 내가 자원봉사로 참가할 기회가 온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오늘 받은 도움을 갚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고마운 마음이 컸다


출발이 늦다 보니 체크포인트를 통과할 때의 시간에 신경이 쓰였다

조금만 지체해도 '20분 뒤에 네 뒤가 닫혀' 이런 협박을 받는 기분이라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실제 반환점을 돌아 달리는 동안 반대편에서 포기자들을 태울 전세버스들이 줄을 지어 뒤따르는 무서운 광경을 보고 꽁지 빠지게 도망런을 펼쳐야 했다

대략 3~5km 간격으로 타임 체크가 있었고 다음 도착지는 몇 분 후에 겠다는 무서운 안내가 나란히 적혀있어 지루할 틈도 없이 도착하고 도망치는 무한반복의 다섯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번엔 25에서 30km 구간을 꽤 잘 참고 뛰어 시간을 벌었다고 내심 좋아했는데 이후 생각도 못한 문제가 생겨 모처럼 벌어놓은 시간을 뒷부분에서 까먹고 말았다


무릎 통증


무릎이 아프면 걸음을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둘 중 하나였다

달리던가 멈춰 서던가

잠깐씩 달리는건 되는데 걷는게 안됐다

걸을 수가 없어 잠깐잠깐 멈춰서 다리를 펴주고 다시 1km씩 잘라 뛰었다

아프다는 느낌과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무릎 통증에 온 신경이 쏠려있어 발도, 다리도, 상의에 쏠려 상처 난 팔 안쪽의 쓰라림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끝까지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남아 기운 나는 응원을 목청껏 외쳐줘 외롭지 않았다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아 보였는지 나를 콕 짚어 부르던 할머니가 계셨는데 "다 왔다 힘내!"

정말 언어의 마법인 듯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40km를 지나면서 마지막 타임 체크

앞으로 9분 안에 피니시라인을 통과하면 완주 성공이다

90분 같은 9분을 달리는데 마지막 모퉁이를 도니 멀리 피니시라인 기둥이 보였다

진짜 다 왔다!!

기어갈 힘도 안 남았다 생각한 다리에 거짓말처럼  힘이 돌았다

힘껏 달렸다

제한시간 직전인데도 어찌나 붐비던지 인파와 체증을 뚫고 골인

만세!!!!!


개인 기록은 4시간 53분 7초

지난 대회의 5시간 6분보다 나름 나아진 기록으로 완주에 성공했다

정말 기뻤다

들어오고 나니 몹쓸 발은 이내 걷기를 포기한 듯 후끈후끈한 통증으로 나를 괴롭혔지만 그러던가 말던가

메달과 완주 기념 타월을 받고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졌다

하얀 발이 드러나니 시커멓게 탄 다리가 도드라져 보인

이것마저도 영광이다

마지막 주자는 커플이었고 거의 걷다시피 들어와 라인 통과 후 뒤를 돌아 90도 숙여 인사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의 도착을 끝으로 올해의 홋카이도 마라톤은 종료

괜히 울컥한 기분이 들어 더 이상 들어오는 사람도 없는 피니시라인을 잠깐 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풀코스 부분의 전체 참가자는 17651명

그중 여성 참가자가 2978명, 외국인 여성 참가자는 87명이었고 나는 1861번째로 피니시라인을 통과했다

통과 부분의 편집 없는 동영상이 올라와 내가 들어오는 모습도 찾아봤다

밀리는 사이에서 빈자리를 찾으며 열심히 달려 들어오는 내 모습이 기특했고 진정한 성공이란 생각에 후회 없었다

느린 내 다리와 발로 기권도 탈락도 없이 완주에 성공했으니 충분히 기쁘고 뿌듯해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리는 요령도 조금씩 습득하고 있어 다음 대회에서는 40분대 후반에 들어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번 대회에서 펀 런의 의미를 배우게 됐던 것도 큰 소득이다

A, B, C그룹에 속해있거나 개인 기록을 목표로 달린 러너들도 많았겠지만 내가 속했던 뒤의 그룹은 즐기며 달리는 사람들이 많아 달리기 외에도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분장을 한 러너들도 많았고

(내 한 몸도 주체를 못 하겠는데 털옷에 털모자를 쓰고 거리에 응원 나온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며 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길가 잔디밭에 돗자리 깔고 앉아 아빠랑 놀던 아이가 달리는 엄마를 알아보고 신나서 부르더니 물을 건네는 모습도 참신했다

엄마는 물 마시고 다시 뛰러 가고 애는 아빠 손잡고 엄마 힘내라고 귀여운 목소리로 소리소리 지르며 응원을 한다

서너 살쯤 됐을까 서있는 다리가 내 팔뚝보다도 가는 꼬마 여자애랑 눈이 마주쳤는데 단풍잎 같은 조그만 손을 내밀며 하이파이브를 청하고

오네짱 감바떼(언니 힘내)!라고 외쳐줘 눈물 나게 감동받기도 했다

(눈에는 내가 아직 오네짱으로 보이니 흑ㅜ)

마라톤은 배고픈 운동이라고 하는데 하도 주는 대로 잘 받아먹고 물을 양껏 마셔서 들어올 때쯤엔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웃겼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다가 뒤늦게 따라온 일행과 함께 발맞춰 골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기록보다는 즐기는데 의미를 둔 마라톤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달리면서도 하나도 외롭지 않았다


제주의 첫 풀 마라톤 대회에서 5시간을 넘겨 비틀거리며 간신히 도착한 내게 격려를 건네주신 아저씨의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늦게 도착해 민망하다 하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은근 마음에 남고 힘들 때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주며 의지가 되고 있다


그래

나처럼 달리는 사람도 있는 거지


꾸준히 가는 놈이 이기는 거랬고

난 그런 놈이 되어 마음이 있는 한 즐겁게 열심히 달릴 거다




 

달리기의 친구라는 무릎 통증

무릎이 아픈 것은 처음이라 덜컥 겁이 났었다

대회 후 그 피곤한 밤에 자다 깨서 무릎에 대한 폭풍 검색을 하느라 밤을 꼴딱 새고말았다

뭔 증, 뭔 증 처음 듣는 병명에 마음으로는 이미 수술대에 올라간 기분이라 절망스러웠는데

다음날은 계단도 못 내려갈 만큼 통증이 심해져서 아침 댓바람부터 드럭스토어로 파스 사러 다녀왔다

하룻밤 자고 났다고 좀 침착해져 달리기 후의 무릎 통증 원인을 제대로 찾아볼 수 있는 냉정이 돌아왔는데 원인은 결국 준비운동 부족이었다

제대로 몸 풀 시간에 커피나 마시고 있었으니 다리가 놀래서 '옛다 무릎 통증이나 먹어라' 해버린 상태였다고 나름 결론을 내렸다

전후의 충분한 준비운동과 스트레칭의 필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오래 뛰고 싶다면 꼭 하자 준비운동!


4일이 지난 지금은 통증이 사라졌고 다리가 제 기능을 찾았다

(천만다행이다)


대회가 자주 열리는 후반기엔 무리한 연습 달리기보다 근력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힘쓰는 운동도 하고 싶어 주짓수 도장을 알아보고 있다

이 분기탱천하고 정의에 민감한 성격에 호신술을 장착한다면?

생각만 해도 스펙터클할 내 앞날들이 그려진다

어디 가서 매나 안 맞고 다니면 다행이지만 달리기와는 또 다른 활력이 될 것 같아 은근 기대된다

운동이 운동을 부른다고 달리기 하나를 시작했을 뿐인데 일상의 많은 부분이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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