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노릇 ep.1
"개같은 소리하네."
기어코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 나왔다. A는 끝까지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 하는 듯 보였다. 나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다 마침내 탄식에 가깝게 뱉은 말이었지만, 그녀는 또 길길이 날 뛰겠지. 안 봐도 뻔하다. 이제 자신을 향해 욕설을 뱉은 나를 향해 온갖 비난과 멸시와 조롱이 쏟아져 나올 차례였다. 하지만 A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그 특유의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가 날 더 열받게 했다.
"개같은 소리한다고."
나는 A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뱉었다.
"뭐?"
또 이런식이다. 이러면 나만 나쁜놈이 되고 만다. 갑자기 온갖 맥락과 상황은 삭제되고 '욕설을 뱉은 나'만이 남아 죄를 심판 받는다. 이런 불공정한 게임은 누가 자꾸 세팅하는 걸까. 누구긴 누구야, 내 앞의 A지.
A의 눈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이제 내가 사과를 해야 할 차례다.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내가 미안하고, 내가 잘못한 걸로 결론이 나야 할 것이다.
나는 평소에 감정의 기복이 적은 편이고 크게 기쁠 일도, 딱히 화날 일도 없어 늘 잠잠한 감정상태를 유지한다. 그런 고요한 호수같은 나에게 A는 매번 돌을 던져 기어코 물결치는 파장을 만들어낸다. 이런 나를 열받게 하고 화나게 하는 사람은 정말이지 드물다. A는 나와 잘 얘기하다가 갑자기 흥분하면서 나에게 쏘아대고 이유없는 비난을 일삼는다. 이런 A를 어쩌다, 왜, 사랑하게 된 걸까.
하지만 사랑이고 나발이고 이런 모습은 나로선 참아주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평소엔 정말 멀쩡한 사람같다가도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으면서 나를 죄어올때면, 확실히 정상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사건의 발단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번엔 환불 기간이 문제였다. 나는 백화점 영수증에 표시된 환불 기간이 일주일이라고 말했다.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 부분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이런 숫자 따위를 기억하는 데는 젬병이었으나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후론 달라졌다. 변호사야말로 숫자에 민감해야 한다. 특히 날짜나 기한에 대해선 더더욱.
그런데 이번엔 내가 실수했다. 환불 기간은 그녀의 말대로 이주일이었다. 내가 이토록 치명적인 실수를 한 건 요즘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탓이다. 환불 기간이 일주일이면 어떻고, 이주일이면 어떤가. 기간이 지나지 않았다면 얼른 가서 환불을 하면 될 일인 것을.
A는 "자기는 매번 이런 기한을 기억 못하더라"부터 시작해서 "항상 본인이 옳다는 그 오만함을 버려. 자기는 절대 틀릴리가 없다는 그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거야?"로 무한히 확장되더니 "아니, 변호사가 이래도 돼?"까지 갔다. 내가 숫자를 기억하지 못했던 모든 순간들이 전시적으로 흘러 나오고 막판에는 나의 직업적인 자질까지 의심해버리는 A. 그녀의 장황한 비난으로 부터 도피하고자 집중력을 분산시켜 물리적으로 안 듣고 있었더니 A는 귀신같이 그 찰나를 포착하곤 파고 들었다.
"왜? 듣기 싫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고 차분한 눈동자. 나는 "응."하고 대답하고 만다.
"그럼 틀리지 마."
이게 무슨 공소시효도 아니고. 송장 접수일도 아니고. 마감 기한도 아닌데. 환불 기간일 뿐인데. 그 기간 좀 착각했다고 이렇게까지 긴 설교를 들을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꾸역꾸역 참고 대답했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
"본인이 틀리면 인정도 좀 하고. 항상 자기가 틀릴 수 있단 것도 늘 염두에 두고."
"그래."
제발 뭐가 됐든 이 언쟁을 끝내고 싶었다.
"근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넌 절대 틀릴 수 없는 사람인데 내가 네가 틀린 거 지적하니까 창피해?"
틀림, 지적, 창피? 뭔 소리냐. 다 집어치우고 그만해라 좀.
개같은 소리하네. 라는 말이 불쑥 속에서 치밀어 올랐고 삼키기 전에 툭 하고 튀어나와 버렸다. 뭐라고 했냐고 재차 묻는 A에게 아냐, 내가 미안. 이라고 대답하면 그녀의 말을 곧이 곧대로 수긍하는 것 같아 차마 그러진 못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A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았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도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회사 선배에게 전화가 왔고, 골치 아픈 의뢰인 때문에 미치겠다며 푸념을 늘어 놓았다. 나는 이미 앞서 A와의 언쟁으로 에너지를 다 소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예예, 아이고, 왜 그럴까, 어휴, 하면서 대충 맞장구를 쳤다. 신나게 자기 얘길 하던 선배는 내 리액션에 영혼도 성의도 없음을 눈치챘는지 그제야 제동을 걸곤 물었다.
"너, 근데 목소리에 영 힘이 없네. 왜 그래?"
"아휴, 아닙니다."
"왜, 또 A 때문이냐?"
나는 선배에게 너무 하찮고도 사소한 문제에서 출발한 그 장황한 언쟁을 설명하기 창피하기도, 피곤하기도 해서 딱 한마디만 했다.
"미칠 노릇입니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