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맛의 김치를 담글줄 아는 사람은 좀 더 삼삼하게 하거나 깔끔하게 할 수 있지만, 겉절이만 담글 줄 아는 사람은 절대 깊은 묵은지의 맛을 낼 수 없다는 신동엽의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그렇네. 겉절이는 깔끔한 맛을 자아내지만, 익을수록 맛있는 김장 김치와는 달리 배추의 숨이 죽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없어진다. 풍부한 맛을 낼 수 있어야 거기서 뭘 덜어낼 줄도 알게 되는 거구나. 정말 미친듯이 열심히 해봐야 나중에 어디서 힘을 빼야하는 지 알고 적당히 완급조절을 할 수 있게 되듯이. 그 완급을 통해 여유를 갖게 되고, 특유의 여유로움은 멋이 된다. 그러니 미처 맛도 들기 전에 괜한 걱정 말고 꽉찬 맛을 낼 수 있을 때까지는 매진해 열정을 쏟아내야지. 꽉찬 맛을 낼 수 있게 되면 간도, 양도, 맛의 밸런스도 내가 조절할 수 있게 될테니.
"난 절대 아빠처럼 의사는 안 될 거야"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네가 결국 의사가 된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금 말의 가벼움과 덧없음을 지독히 깨닫는다. 흰 가운이 너무 잘 어울리는 너를 보면서 시간의 힘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무색히도 실감한다.
결국엔 의사가 되고 말았구나. 네가 그토록 싫다던, 절대 그렇게는 안 되겠다던 아빠처럼 되고 말았구나. 너도 이제 너무 능숙하게 환자를 보고, 당연하게 병원으로 출퇴근 하는 의사가 되었구나. 하지만 나는 네가 절대 의사는 안 할거라던 그때에도 섬세한 네 손끝을 보면서, 줄곧 너 몰래 너의 아버지처럼 될 미래의 너를 응원했었다. 그건 철저히 비밀이었지만, 지금은 이미 의사가 되었으니 조심스레 고백해본다. 네가 좋은 의사가 될 것 같은 멍청한 확신 같은 게 나에겐 있었다고. 오랜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결국 멋진 의사가 된 네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진료 후 너는 여느때처럼 운동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 기네스 한 캔을 따서 꿀떡꿀떡 마셨겠지. 너의 그 모습이 안 봐도 훤하게 그려져.
너의 성실함에 대해 너는 "난 겁이 많아서 그래." 라고 너무도 겸손하게 표현 했었는데. 너보다 겸손한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서로를 속이지 않았다. 상처를 준다 해도 결국엔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 하지 않았다. 서로를 기만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 했기에 서로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용기를 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 사이엔 자연스레 두터운 신뢰가 쌓였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을 온전히 믿고 차곡차곡 신뢰를 쌓아간다는 게 참 어렵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웠던 것 같다.
영화 타르(TAR)를 봤다.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신경질적인 예민함이 이상하게 섹시하게 다가왔던 영화다. 베를린 최초의 여성 지휘자 리디아 타르가 주인공인데 처음엔 상황 설정이 너무 리얼해서 실화인 줄 알았다. 케이트 블란쳇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배우다. 호주 출신인 그녀는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가 너무 우아하고 매력적이다. 아무 대사 없이 깊은 눈빛 만으로 스크린을 압도해버린다. 주름, 광대뼈 밑 움푹 페인 볼 때문에 지는 음영, 턱 관절의 움직임까지도 미세하게 조절하는 케이트 블란쳇은 극 중 인물 그 자체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속절없이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린다. 타르를 보면서도 뒷목이 뻣뻣해지는 걸 느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영화를 끝까지 봤더니 체력 소모가 제법 컸다.
예민함은 필연적으로 피로를 유발한다. 작은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 예민함이 경외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뭐든 둔감하고서는 거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님 타르의 그 신경질적임이 자신에 대한 높은 기준을 동반한 완벽주의와 프로패셔널함을 대변하기 때문이었을까.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 예민함이 없었더라면 세상에 많은 예술이 탄생조차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타인의 불행에서 안도의 씨앗을 줍지는 않았는지 문득 되돌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