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성 폭우’라는 특이한 장마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낮에는 멀쩡하다가 깜깜한 밤이나 새벽에 미친듯이 굵고 무거운 물방울이 쏟아져 한바탕 휩쓸고 가는 야행성 폭우. 자고 일어나면 또 멀쩡하게 비가 한 방울도 안 내린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도깨비 장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낮에는 난류가 방패 역할을 하면서 수증기 유입을 막지만, 대기 하층의 난류가 줄어드는 야간에는 수증기가 확 밀려들면서 비구름이 폭발적으로 발달해 더 많은 비가 쏟아진다고 한다.
폭우는 울음에 비유하자면 '폭풍 오열' 아닐까. 야행성 폭우는 밤에는 광광 울면서 폭풍오열하고 또 날이 밝으면 꾸역꾸역 울음을 참아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새침을 떠는 사춘기 여중생같다. 나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줄곧 내내 엄청 울었는데, 그러고 나니 또 후련해져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희미하게 비치는 햇살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귀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의도는 선한데 그 결과가 나에게 막대한 괴로움을 주는 거라면, 그게 계속 반복된다면, 나는 그 선한 의도를 '선하다'고 받아 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상대를 괴롭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상대에게 괴로움을 초래해 고통을 줬거나 피해를 줬다면, 사과를 하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기분 나쁘게 할 의도가 없었음에도 상대가 기분이 나빴다고 하면 사과를 하면 된다. 미안하다고, 하면 된다.
악의 없는 선량한 의도와 달리 너무 고통스러운 결과가 주는 고통과 피해, 그 괴리에서 항상 괴로워 했던 나는 상대에게 원망이 들 때면 죄책감이 들곤 했다. 선한 의도라는데,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는데, 그런 상대를 원망하는 내가 나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도만큼이나 그것이 초래한 결과도 중요하다. 나는 이제 더이상 죄책감을 갖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내가 괴로웠던 건 나의 고통에 대해 일말의 공감없이 매번 선한 의도만을 강조했던 상대의 태도였던 건 아니었을까. 매번 '그래, 나를 괴롭힐 의도는 없었어'하고 넘어가버렸지만 더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 결심만으로도 나는 훨씬 덜 괴로워졌다.
백오이를 사서 아코디언 오이무침을 만들었다. 양면으로 아주 잘게 칼집을 내어 아코디언 모양처럼 보이는 이 오이무침은 식감도 모양만큼이나 재미있다. 새콤달콤한 양념에 무쳐 먹으면 아삭아삭 정말 맛있다. 냉장고에서 시원하게 한 후 꺼내 먹으면 더 맛있는 여름철 별미다. 하지만 이 오이무침에서 가장 중요한 건 칼집도, 양념도 아닌 다름 아닌 숙성이다. 오이에 소금을 뿌리고 적당히 재운 뒤 물기를 제거한다. 너무 오래 재워도 흐물흐물해져 오이의 식감이 사라지고, 그렇다고 너무 짧게 재워도 간이 충분히 베지 않는다. 사실 이 소금에 재우는 과정이 완벽하면 별다른 양념 없이 식초에 참기름만 살짝 넣고 버무려도 맛있다.
너무 날 것이어도 안 되고 너무 숙성되어도 안 되는 요리들이 있다. '적당히' 숙성되어야 가장 맛있는. 감정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은 순수하지만 풋내가 가시지 않아, 그대로 노출했을 때 상대에게 조금의 당혹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숙성된 감정도 상대에게 가닿기 힘들다. 뭐든 적당한 숙성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너와 달리 나는 여전히 박상영과 김영하를 읽는다. 처음 그들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래도 박상영이 신작을 낼 때마다 꼬박꼬박 책을 사읽고 그의 에세이도 소장은 하지 않을 지 언정 다 읽었다. 김영하는 하도 여러번 읽어 대사를 다 외울 지경인 소설들을 다시 읽는다. 예전 작품들을 읽다가 또 최근 작품들을 읽으면 미세하게 변하는 스타일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게 또 재밌다. 네가 더는 이들의 글을 읽지 않기 때문에 박상영과 김영하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없다는 건 조금 서운하지만, 아무렴 어때. 혼자 읽어도 좋다.
월요일부터 또 강풍과 폭우가 예상된다는데, 이번에도 밤에 몰래 울고 아침에는 시치미를 뗄 지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