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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찌 Oct 20. 2024

3-4. 과거와 현재의 나는, 각자의 타인이다.

- 모든 순간의 선택들


「니체의 영원회귀에서 모든 내일은 오늘이고 모든 오늘은 내일이다. (…) 니체는 말한다. 편집은 안 돼. 아주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네 삶을 전부 받아들이거나, 전부 잃거나 둘 중 하나야. 예외는 없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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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물이 유행이다. 웹툰, 웹소설, 드라마에서도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한 주인공이 이전 삶의 실수를 바로잡으며 모든 일을 척척 해결해 나간다.

  인물이 성장할 시간도 길게 필요하지 않고, 답답한 전개도 없다. 일명 ‘고구마 타임’이 없다. 미래를 알고 있어 신과 같은 전능자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임을 독자는 안다. 회귀한 주인공은 과거의 자신이 내렸던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불안함 없이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내게는 주인공이 부수는 건, 작품 속 대립자(적)가 아닌 ‘과거의 자신’인 것처럼 느껴져 어딘가 씁쓸해지기도 한다. 하긴 회귀물은 애초에 첫 번째 생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아 다른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이 작품의 기본 설정값이자 이야기의 목표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런 회귀물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든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때 다른 선택을 할까?’


  ‘문송합니다’의 문과 대신 이과에 갔을까?

  친구와 반농담으로 술자리 안줏거리로 삼는 ‘경영은 모든 분야에 쓸모가 있지만, 경영만 전공한 사람은 쓸모가 없다’라는 경영학과 대신 다른 전공을 선택했을까?

  20대의 절반을 써 버리고도 합격하지 못한 공무원 공부 말고, 일찍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을까?

  나와 안 맞는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세 곳이나 이직, 이직, 이직하던 공공기관 대신 다른 분야의 직장을 찾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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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나의 대답은 결국 ‘아니’다. 지금에 와서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건,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른 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나와 동일인이 된다면, 나는 다시 쉽게 선택을 번복할 수 없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후회는 내가 의지적으로 떠올린다기보다는 후회란 놈이 의지를 가지고 내 머릿속을 후벼 파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후회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회귀해도 똑같은 선택을 내린다는 건 후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은 타인이 된 ‘과거 나’의 고민과 결정을 이해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정신 승리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과거 미화라면 아주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에 나는 어땠더라. 정확하게 이유를 기억하지는 못해도 처절히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마음만은 선명하다. 과거의 내 고민을 바라보는 건 길가에서 우는 아이를 바라보는 일 같다. 왜, 길에서 아이가 꺼이꺼이 서럽게 우는 모습을 어른들은 귀엽다는 듯이, 혹은 귀찮다는 듯이 바라보지 않나. 아이가 우는 이유는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하잘것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아이에게 그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며 서러운 것일 테다. 마찬가지다. 몇 년 전의 나는 분명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환경, 분위기… 그러니까 가족, 친구, 경제적 상황, 사회적 인식 따위가 있었을 테다. 거기에 내 내부의 두려움, 패기, 인정 욕구, 안정성 추구 등이 곁들여 있었을 테고 그게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겠지. 무엇보다 그 선택과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내가 있었다.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이라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그건 지금의 나는 과거 선택의 책임에서 한 발 떨어져 타인의 눈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문제가 지금 보면 참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로 회귀하여 다시 선택의 결과를 책임을 지는 주체가 된다면, 지금의 나라는 타인의 시선에서 내린 선택과 같을 수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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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하라는 조언이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나를 꼭 실패자로 버릴 필요는 없다. 그러면 결국 지금의 나도 미래의 나에 의해 실패자로 버려질 것이다.

  삶의 연속성 안에서 타인이 된다는 건 과거의 나를 버린다기보다는, ‘성장’이라 부르는 것, 혹은 ‘변화’라 부르는 것이 일어났을 뿐이다.     


  니체의 “편집은 안 돼. 예외는 없어.”라는 과거로 돌아가도 결국 반복된다는 영원회귀가, 에릭 와이너의 “나는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똑같은 길을 걷고 또 걸을 것이다.”라는 말이 원망스럽다기보다는 위안이 되는 이유다.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과거의 나는 그 선택을 내린 이유가 있었고, 그건 ‘실패’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나는 과거로 회귀한다고 해도 아마도 문과를 택할 테고, 경영학과를 택할 테고, 안정적인 직장이 천직이라며 공무원 공부를 할 테고, 시간을 무마하고자 공공기관에 입사할 테다.

  똑같이 울고불고, 퇴사하고 입사하고를 반복하다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의심이라는 걸 처음 할 테다. 그리고 백수가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처럼 책이나 읽으며 보내는 백수 기간을 나중에 타인으로서의 내가 되어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과거의 나를 ‘실패한 선택’을 내렸다고 치부해 버리지 말자고 다짐한다. 

  지금 감히 책씩이나 읽는 백수가 되는 선택을 한 건, 지금의 나에게는 세상 가장 중요한 것이 달려있기 때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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