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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장마에 대해

비와 나

by 에밀리

계절이 오는 것은 사람이 오는 것과 닮았다. 아주 비밀스럽지만 아주 명확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는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깨닫고 난 후에는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어떠한 사람을 어느 순간부터 불현듯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봄에서 여름이 오고 여름에서 가을이 온다. 그리고 때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을과 이별하여 겨울의 한복판에서 눈을 맞고 서있기도 한다.


내게 가장 보내기 싫은 계절은 여름이다. 여름이 너무 좋아서는 아니다. 특히 여름의 장마는 반가울 때보단 얄밉고 귀찮을 때가 더 많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름을 구질구질하게 붙잡고 싶은 이유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순간 때문이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게 되면 쨍쨍한 햇볕, 끈적한 땀과 첨벙이는 물웅덩이, 척척한 바짓단 같은 것들과 정신없는 난투극을 벌인다. 그 유치한 투쟁에서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다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며 한발 뒤로 물러나 한숨 돌리고 있노라면 어느새 하늘이 저만치 높아져 있는 때가 있다. 그 순간 불어오는 시원한,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슬픈 구석이 있는 바람을 느낀다면 그 순간이 바로 가을이 온 순간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그 순간은 마치 인생의 결승선에서 울리는 종소리 같다. ‘자, 이제 다 끝났어요. 모두들 수고했어요. 이제 돌아가도 좋아요.’ 하는 듯한 기쁨과 아쉬움이 뒤섞인 냄새가 난다. 그래서 끝에 대해 배우게 되고, 언젠가 나에게도 반드시 찾아올 인생의 끝을 예행연습하는 기분이 든다. 그러한 예행연습은 내게 아직은 버겁게만 느껴져서 밀려오는 감정들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른이 될 것만 같아서 무섭다. 결국 그런 순간을 일단 싫어하기로 결정하고 여름을 힘껏 붙잡아 보기로 한 것이다. 비겁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삶의 진실을 덮으면 덮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나의 그런 눈먼 믿음과 고집에 하늘이 말을 걸 때가 있다. 여름의 하늘은, 아직 나에게로부터 그리 멀리 높아져 있지 않은 한여름의 하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세차게 비를 뿌린다. 어느 순간부터 조용하고 착한 소리로 내리기 시작하던 빗방울은 시간이 지나면 거세지기도 하고 끈질겨지기도 한다. 마치 긴 세월을 살아 나가는 인간의 품성처럼. 그러한 끈질긴 장마에는 자동차가 잠기고 건물이 잠기고 그 속의 인간에게 소중한 온갖 것들이 잠기고 또 땅이 잠기고 강이 잠긴다. 많은 것들이 잠기고 또 고요해진다. 그렇게 비가 오는 날, 듬직한 버스에 올라타 창밖을 내다볼 때면 내 안의 두려움과 마주하게 된다. 내 안의 많은 것들이 잠기고 오로지, 오롯이 나만 남기어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빗물을 머금어 더욱 선명해진 도로와 나무들의 빛깔처럼 내 자신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어리고 외로운 그 모습을 보게 되면 나는 덮어두었던 삶의 진실을 꺼내어 그 아이를 위로하고 싶어진다. 인생의 가장 참된 열매, 眞實을 다정하게 건네고 싶어진다. 괜찮다고 또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진다. 그런 나를 보고 비를 품은 하늘이 말을 건다. 그렇게 말해주어도 괜찮다고. 때로는 한없이 바라보기만 하고 때로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기도 하며 나를 만나고 나면 어느새 내릴 곳이 가까워져 있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우산 하나와 함께 장마를 지나쳐 오고나면 어느새 풀잎은 한층 더 싱그러워 있다. 어디서 힘을 얻었는지 꽃은 알록달록 그 아름다움을 더욱 힘껏 뽐내고, 멋지고 긴 강은 더 멋있어져 있다. 그것들은 성장한 것이다. 마치 긴 세월을 살아 나가는 인간의 품성처럼. 장마와 함께 성장한 나는 이번 가을을 두 팔 벌려 내 안으로 맞아들인다. 아름다운 자연처럼, 그리고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인간처럼 더 이상 가을을 두려워하지 않고 긴 장마 후에 더 풍성해질 추수를, 그 아름다운 끝을 기꺼이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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