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도 안 보는 여자. 거울도 안 보는 여자. 외로운 여자. 오늘밤 나하고… ”
근 30년 만에 찾아 들어본 노래 가사에 웃음을 깨문다. 나는 거울을 안 보지만 외롭지는 않은 여자다.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감을 수 없어 온 세상이 깊이 잠든 한밤의 고요를 사랑하는 여자다.
평일 아침이면 직장으로, 저녁이면 집으로, 주말이면 시립도서관으로 도망치기 바쁜 얼치기가 하루치 의무를 한다. “좋고 나쁘고”의 영역을 벗어난 사회적 책임으로 엮인 시간 속에서 호시탐탐 “혼자 ”가 되고 싶은 나에게 “쓰기”는 거울이다.
메모 아니면 실수를 면할 길 없고, “뇌” 아닌 “가슴”으로 인식하는 세계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범람한다. “엄마눈”이란 것이 가슴으로 공명하는 기관인지라 어떤 미진함이 뜨겁게 끓어오르면 표적 없이 부푸는 상념이 내 이성을 집어삼킨다.
황정은 작가는 “내가 겪은 일이 나를 먹어치우지 않도록”이라고 썼다.
원고를 쓰는 동안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고 했다.
나를 지켜내는 것 혹은 나를 마주하는 것. 가슴속에 복받치는 감정을 한 가닥 한 가닥 올올이 해부하는 것. 수술용 메스로 환부를 도려내듯 아파도 관통해야 비로소 끝나는 무엇.
그 무엇을 근근이 가능하게 하는 거룩한 의식. 그것이 내게는 ‘쓰기’다.
거울 앞에 서면 꼼짝없이 인정하게 된다. 나라는 인간이 문제해결에, 자기 통제에 얼마나 취약한 동물인지…
게으른 것도, 의지가 약한 것도 “장애가 있어서”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다.
진취적이지 않은 것도 소심한 것도 “안 보여서”라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세상 모두를 쉽게 속였어도 끝까지 속아 넘어가 주지 않는 골치가 바로 서슬 퍼런 자의식이다.
가슴에 맺힌 비굴함과 치사함이 손가락을 타고 쏟아지면 더는 도망칠 제간이 없다. 키보드 음소를 조합하듯 엉클어진 생각 퍼즐을 주섬주섬 끌어 모은다.
한바탕 쓰고 나면 앞뒤 상황이 보인다. 며칠 굶은 사람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집어삼킨 뒤에야 비로소 주변을 살피는 것과도 같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안구의 혼탁한 수정체를 교체하는 것만큼이나 극적인 처방이다.
미약하나마 문제해결의 의지가 꿈틀거리는 시점이다.
혼자서만 펄펄 끓는 용광로라면, 비록 그 정체가 사랑일지라도 반짝일 수 없는 법.
사랑하는 이들에게만큼은 작아도 멀어도 별이고 싶었다. 정갈한 시선일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점자도서관에서 제작한 온라인 음성 강의를 듣는다. 제목은 소설 창작이다. 내 생을 짧은 이야기로 직조할 수 있을까?
학창 시절에는 주로 장편소설을 들었다. 현실 도피 차원으로 독서했으므로 긴 작품에 손이 갔다. 더 깊이, 오래 침잠해도 좋을 서사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시간이 흘렀다. 송곳 같은 문장으로 내 생을 조명하고 싶어서 소설을 듣는다.
억지로 먹어야 하는 고약 같은 장애 이해가 아니라, 교과서에 박힌 영혼 없는 인식 개선이 아니라 그냥 내 삶을 이야기로 조명해 보고 싶다. 내가 알 수 없는 타인의 세계에 이야기를 통해 스며드는 것처럼 시각장애가 있는 몸을 가감 없이 말하는 것. 한 인격체로서의 고요한 외침을 ‘책’이라는 정제된 물체에 담아내는 것. 쓸모 있는 일 아닌가?
저자와 독자는 서로에게 ‘별’이다. 깊고 멀고 아름답다.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송이 하나.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작가 최진영의 문장이다. 모래알 하나의 힘을 나는 믿는다.
한 개의 빗방울, 찰나의 눈송이. 각자 온전한 그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 좋겠다. 소멸하는 그 순간에도 마음껏 빛나면 좋겠다.
독자를 상상한다. 원고를 쓴다. 두 번째 책 제목을 고심한다.
‘시각장애’란 단어를 빼고는 나를 설명할 수가 없다.
원고는 나를 지탱한다. 마감은 깨끗한 성취다. 비루한 생이어도 한 편의 소설로 읽힐 그날을 상상하면 견딜 수 있다. ‘인물, 사건, 배경’이란 공식에 오늘의 에피소드를 갈아 넣는다.
웃을 일도 울 일도 싱싱한 글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