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우리 반 학생이 체육 시간에 다쳐서 병원에 다녀와야 했고, 수업 시간 말고도 2시간 이상의 회의가 있었다. 외부 강의 때문에 저녁에는 교육청에 가야 했다. 가끔 머리털을 뽑아서 분신술이라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 있는 머리도 잘 지켜야겠지만.
저녁 8시.
드디어 일을 마치고 집에 가려고 자동차를 탔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스마트폰도 차에 놓고 내렸었다. 이렇게 정신없는 날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이야기가 머리에 스치는 걸 보니.. 이제 나도 조금씩 아재와 꼰대로 가는 나이인 것 같다.
부재중 한 통화.
이럴 때 나한테 오는 전화는 대출, 보험, 심지어 보이스피싱이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아주 반가운 부재중 표시였다. 제자 중에서 연락을 거의 하지 않는 아이의 전화였다. 이 제자의 나이를 생각해 보았다. 나이로 보면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시기 정도이다.
전화하기 전에, 왜 전화했을까를 생각하다 보니까, 취업해서 자랑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대학원에 간다고 하지 않았을까. 작은 희망이지만 내가 보고 싶다고 한 건 아닐까 등등.
궁금하면 행동을 해야 한다. 바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근데 이상하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이나 걸었지만 전화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내 부재중 전화 기록을 보면 다음 날 할 줄 알았다.
다음 날도 정신없이 보냈다. 그 후로도 거의 두 달 동안은 일에 치여서 살았다. 전화도 잊고 있었다.
바쁜 일이 한 참 지나고 어느 제자한테 전화가 왔다. 난 참 제자들의 전화가 반갑다. 왜 그런지. 연락이 그리운 건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의 내 모습이 그리운 건지.
“선생님 잘 지내시죠”
“그럼. 엄청나게 잘 지내지.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안부를 주고받은 후에 제자는 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했다.
“선생님, 000가 안 좋은 선택을 했어요.”
순간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부재중 통화 기억도 생각이 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 후에 우울증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에 갔지만, 자취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한 것 같다.
2년간 40명의 같은 아이들과 같은 반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했지만 40명의 아이들의 고등학교 2/3의 담임교사가 나였다. 물론 교직 생활 초기여서 열정적으로 보냈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항상 추억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000의 소식이 더 충격이었다.
당시 반장이었던 아이에게 아이들을 단체 톡방에 초대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몇 자를 적어 봤다.
모두들 잘 지냈니? 몇 명은 가끔 연락했지만 모두 건강히 지내나 모르겠구나. 선생님이 반장한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단다. 한 마디하고 싶어서.
다른 건 아니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있고, 졸업할 때인 사람도 있을 거고, 사회생활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다들 고등학교 때보다는 많이 힘든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말도 있어서 만들어 달라고 했어. 최근에 안타까운 소식도 들었고.
선생님은 가끔 힘들 때 너희들과 지냈던 시간을 생각하며 웃으며 지낸단다. 교직생활에서 너희랑 함께한 2년은 선생님한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단다. 너희들은 어땠는지 모르겠구나.
지금 생각해도 너희들이 최고였어. 그런 우리 아기들이 벌써 20대 중반이라니..
선생님 눈에 아직 우리 반 애기들이어서 걱정되지만 잘 지낼 거라고 생각하고 믿을게.
항상 힘들고 지칠 때.. 세상에 내 편이 없다고 느낄 때. 너희를 응원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거 잊지 말아 달라고. 선생님은 언제나 너희 편이니까. 힘들면 언제든 전화하고.
선생님도 힘들 때 너희가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고 있을게.
선생님 생각날 때마다 가끔 이 단톡 방에 글 남겨도 되지? ^^ 우리 행복한 반 항상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
사실 이렇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난 2달 정도 너무 가슴이 아팠다.
‘내가 그때 전화를 받았어야 했는데.’
이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 이후로 부탁이나 일이 들어오면 사양하게 되었다. 뭔가 소중한 것을 잊고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항상 나사 풀린 사람처럼 지냈던 것 같다. 하는 일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 뭔가를 놓치고 사는 것 같았다.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아픈 마음이 조금씩 덜 아프게 되었다. 신기하다. 학교 아이들을 만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니까 그 일이 조금씩 기억에서 옅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