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씨께

D+2307 둘째

by 바다별

저녁까지 일이 있어 아이들이 잠든 후에 집에 돌아왔다.

아내 혼자 고생하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서둘러 왔는데 의외로 집안이 조용하다. 일찌감치 공부를 마치고 사이좋게 잠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식탁 위에 뭔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여기에 누펴주세요. 이불 덥어주세요;;;

이게 뭐야 하고 다가가는 나에게 아내가 말했다.

"애들이, 아빠가 그거 못 치우게 하라고 신신당부 했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장난씨에게 보내는 편지다.



우리집에는 장난씨라는 요정이 있다.

장난씨는 ‘정리하지 않은 장난감’을 ‘주인 없는 장난감’이라 여기고 가져가 버린다. 그리고는 한 달 정도 실컷 가지고 놀다가 다시 돌려준다.

물론 실제로는 며칠 동안 정리 안 된 장난감을 창고 깊숙한 곳에 숨겨두는 것이지만, 첫째가 3살 때부터 시작된 장난씨 이야기를 아이들은 아직 믿고있다.


그러다 보니 아끼는 장난감을 찾지 못하면 장난씨가 가져갔다고 생각하고 제발 돌려달라며 편지를 쓸 때가 있다. 그럴때면 나는 숨겨둔 장난감을 돌려주고 “앞으로는 정리를 잘해라”고 경고의 편지를 함께 보낸다.

식탁위의 편지를 보니 오늘 사라진 장난감은 둘째의 크롱인형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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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에는 내가 숨긴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러다보니 결국은 나도 어디있는지 모르는 장난감을 온 집안을 뒤져가며 찾아야 했다.

다행히 작은방 옷장에서 크롱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아이들의 요청대로 이불까지 잘 덮어주고 앞으로 잘 챙기라는 편지도 함께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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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둘째는 일찍부터 벌떡 일어나더니 식탁부터 확인한다. 그리곤 크롱이 돌아왔다며 펄쩍펄쩍 신이 났다. 함께 둔 편지를 챙겨와서 첫째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잠든 척 아이들 반응을 살피는데 첫째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거 아무래도 아빠가 쓴 것 같은데?”


뭐지? 왼손으로 쓴 건데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깨어있다는 걸 들킬까봐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졌다.


초등 2학년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아무래도 장난씨는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