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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Oct 10. 2023

내 아이가 나를 너무 닮지 않기를.

Ben Folds - Still Fighting it


이번 주말 사이 집 근처에서 꽤 큰 축제가 있었다. 토요일 나는 주말 근무가 있어 오후 늦게까지 집을 비웠고, 용감한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그 축제에 갔다. 아이와 실랑이를 하며 유모차를 끌고 1.5km가 넘는 거리를 걸어간 것이다. 때로 나보다 무모해 보이는 아내가 불안하기도 하지만 용감하고 대담한 면은 항상 존경한다. 아마 내 만류가 아니었다면 혼자서 차에 아이를 태워 여기저기 다녔을지도 모른다.


난 20여 명의 학생을 인솔하여 최순우 옛집, 한용운 심우장, 동양서림 등의 장소를 돌아다녔고, 해가 질 무렵 대학로에서 연극 관람을 끝으로 아이들을 해산시켰다. 연극 중에 비행기모드로 해 놓은 스마트폰을 켜 문자를 확인하곤 깜짝 놀랐다. 1시경에 축제로 출발한댔는데, 6시가 다 되어 갈 때에도 그곳에 있다는 아내의 연락이 와 있었다. 아니, 낮잠은? 기저귀는? 점심은? 아내의 체력은?


소심한 나는 곧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고, 꽤 오랜 다이얼 소리 후에 아내는 받았다. 시끄러운 주변 소리를 배경으로 아내는 문자 그대로 아직 축제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아마 거기에 있을 거라며 웃었다. 아이가 소떡소떡을 맛나게 먹고 있다고.


빨리 달라고 손짓하고 있다.

역에 도착하여 아내가 있다는 무대 뒤편을 찾아 열심히 걷고 뛰었다. 우리는 몇 번의 엇갈림 끝에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초록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소떡소떡을 불편하게 들고 있는 아내가 있었다. 노란 풍선이 달린 유모차에서 아이는 나를 알아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늘 자신이 본 일화를 신나게 말했다. 아이의 말은 항상 신비롭다. 때론 다른 사람이 한 말이나 티브이나 유튜브에서 나오는 문장을 따라 하기도 하고, 자신의 내면을 읊는 사적언어(private speech)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이해한 바를 말할 때는 감동적이다. 어른의 틀에 박힌 언어가 아니라 아이의 시선, 아이의 언어라니.


우리는 해가 떨어지고 어두컴컴한 대로를 따라 걸었다. 가다 멈춰 아이는 떡 조금, 소시지 조금 베어 물고. 또 가다가 멈춰 떡, 소시지 한 번씩 베어 물고. 꿀꺽. 물 한 모금. 큰 교차로를 하나 지나자 소떡소떡을 다 먹은 아이는 안아달라 칭얼거렸다. 내가 안아 걷고 아내는 유모차를 끌었다. 또 다른 교차로를 지나고 아내가 아이를 안고 내가 유모차를 끌었다. 우리는 힘겹지만 뿌듯하게, 그리고 조금 설렌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일과가 끝나고 아이를 재운 후, 아내에게서 축제 때 찍은 사진을 받았다. 아이는 작은 자동차도 타고, 소방관 복장을 입고 사진도 찍고, 경찰차도 탔다. 아내가 졸린 아이를 데리고 카페에서 맛있게 빵을 먹이자 아이는 다시 각성하여 낮잠을 건너뛰었다고 했다. 아. 그런데 한 사진 속 경찰바이크를 탄 아이의 표정이 눈에 띄었다. 두 손의 손가락은 배배 꼬여 있었다. 다리는 쭈욱 뻗어 있었다. 굉장히 긴장하여 경직된 표정과 자세. 아이의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긴장한 표정이 안쓰러웠다.


손가락이 꼬여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미안함을 느꼈다. 세상 모든 부모가 자식을 향한 부족한 사랑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겠냐만은 그게 나의 감정이 되니 그 슬픔은 얕지 않았다.


첫 번째 미안함은 아내와 내가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아이에게 풍성한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이전 글들에서도 밝혔듯이 나와 아내는 밖으로 많이 돌아다니지 않았다. 특히, 나는 직접 경험이 꽤나 부족하다는 자격지심 같은 걸 항상 지니고 있다. 아이에게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게 하고 싶어 조금씩 다니고는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죄책감 같은 게 있었다.


두 번째 미안함은 좀 더 근본적인 건데, 아이에게 나의 소심함, 겁 많은 심성을 물려주지 않았을까 하는 거다. 우리 아버지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신다. 예를 들면, 밥은 천천히 꼭꼭 씹어먹으라거나. 내가 고시원에 혼자 살 때에는 혹시 겨울에 질식하지 않을까 꼭 문을 1cm 열어놓고 자라고 하시거나. 빙판길에 넘어지지 말라고 주머니에 손 빼고 장갑을 끼고 다니라고 하시거나. 운전을 시작했을 때에는 차선변경이나 고속도로 주행에 관해 전화로 끊임없이 잔소리하셨다. 문제는 같은 내용을 매번 반복하셨다. 그리고 간혹 나도 아내에게 잔소리를 하는 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만나게 되면 흠칫 놀라기도 했다. 이거 완전 아버지랑 똑같잖아 하고. 물론, 그 잔소리는 당신 나름의 아들에 대한 사랑 표현일진대, 결국 그 근본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과한 조심성, 걱정, 불안, 두려움에서 비롯됨이 틀림없다.


아버지를 닮은 나의 이런 소심함이 때로는 우리 아이에도 보이는 듯하다. 놀이터에서 한 아이와 부모가 비눗방울 놀이를 하면 보통의 다른 아이들은 방울을 쫓아다니며 즐긴다. 우리 아이는 그 모습을 멀리서 빤히 쳐다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눗방울을 피하거나 나중에 터지지 않고 바닥에 앉은 작은 방울 몇 개를 손가락으로 터뜨리는 정도로 논다. 한 번은 아이를 데리고 스님이신 고모부를 처음 방문할 때였는데, 절간의 낯설고 기묘한 분위기와 냄새에 아이는 이미 기가 푹 죽어 있었다. 회색 승려복을 입고 민머리의 키가 장대하신 고모부가 문 앞에 나타나자 아이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마 추운 겨울에 절 마당에서 30분은 넘게 엄마에게 안겨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때 내 삶의 중요한 테마는 ‘용기’였다. 지하철의 싸움을 말리는 멋진 사람이 가진. 선뜻 카드를 내며 계산하라는 부장님이나 선배가 가진.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해 떳떳하게 분노를 표현하거나 요즘 특히 많이 눈에 띄는 빌런을 참교육할 수 있는 그런 용기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고, 부정의(不正義) 한 일을 목격하거나 사람을 맞닥뜨리면 가슴이 쿵쾅쿵쾅 울리고 머리가 하얘진다. 최소한 우리 가족이라도 지키고 싶은지, 달리기를 할 때면 가끔 아이나 아내에게 차가 덮칠 때 내가 감싸 안는 상상을 반복해서 하기도 한다. 본능에 따라 내 몸 하나만 피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 않고 싶다.


아내가 좋아하여 자연스럽게 나도 좋아하게 된 Ben Folds라는 음악가는 'Still Fighting it'이란 노래에서 자신의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노래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이란성쌍둥이 중 아들을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는데, 태어난 아이를 안아 올렸을 때 문뜩 든 미안함을 들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도 처음 아빠가 되어 모든 일이 서툰 상황에 아이를 충분히 보호해주지 못할까 미안했다고 한다. 분명 자기가 이미 걸으며 가졌던 좌절, 고통, 슬픔의 길을 아이 역시도 걸어가야 함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https://youtu.be/WEC9Eo_nWwg?si=uyYHTKUmt4SK2wUQ


Everybody knows
모두는 알고 있지
It hurts to grow up
성장은 아프다는 걸
And everybody does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아파하지
It's so weird to be back here
여기로 돌아오다니 참 이상하구나
Let me tell you what
내 말 들어볼래?
The years go on and
세월이 지나도
We're still fighting it, we're still fighting it
우리는 여전히 싸워나가고 있을 거야
And you're so much like me
그리고 넌 정말 나를 많이 닮았구나
I'm sorry
미안하다
(Ben Folds - Still Fighting it 중)


교육 철학을 공부할 때, 실존주의 철학에 큰 매력을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깊이 있게 철학을 파고들었나 하면 또 그렇지는 않지만, 카뮈를 읽으려 해 보고 니체를 읽으려 해 보았다. 뭐... 무슨 말인지 도통 알지 못했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일도, 초인이 뭔지도. 그래도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본질 이전의 실존,' 즉,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에 던져졌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와닿았다. 윤태호 웹툰 '미생'에서 신입사원의 힘겨움을 팀장, 부장, 과장 등 여러 선배들과 9점을 내주고 두는 바둑 같다 표현했다. 이와 비슷한 듯하다. 우리는 세상에 벌거벗은 채 던져졌다. 아이는 나의 심성을 많이 닮아 새로운 경험을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내가 겪었던 고민과 고통에 아이도 힘겨워할지도 모른다. 결국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고,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쉽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아이를 감싸고 싶고 지켜주고 싶다. 이런 번뇌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아이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옆에서 지켜봐야 할까. 부모가 되는 건 그런 건가.


만화 '아톰'을 리메이크 한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란 만화에서 게지히트란 로봇은 아내와 함께 입양할 어린 로봇을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구가 멸망해도 절대 너를 놓지 않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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