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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가을 Jul 12. 2022

저 선생님은 왜 화를 내?

초예민 영어강사의 수업일지 1


어학원이 밀집된 종로 2-3가.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와 그곳으로 향한다. 첫 강의가 시작되는 새벽 6시 20분 전에 미리 학원에 도착해서 강의자료 체크. 각종 기기 및 마이크 체크. 그리고 외모도 체크. (분명 드라이하고 나왔는데 이동하는 중에 혹시 다시 곱슬거리는지 체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


아-잠이 덜 깬 듯 머리가 무겁다. 속으로는 어딘가 잠깐 앉아서 쪽잠이라도 더 자고 싶을지언정, 피곤해 보이는 학생들이 하나 둘 강의실을 향해 걸어오면 "이렇게 피곤한데, 어제 야근도 했는데 새벽에 일찍 공부하러 나오는 여러분 최~고!" 라며 나도 모르게 분위기를 띄운다. 맞다. 정말 최고이고 대단한 거다. 나야 뭐 일하러 나오는 거지만, 이들은 일하러 가기 전에 공부까지 하기 위해 이불을 박차고 나오는 거니까.


강의실 앞 작은 소파에 학생들과 옹기종기 앉아 잠깐 커피 한 잔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게 피곤함이 조금은 사라진다. 역시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에너지란 대단하다. '좋아! 자 그럼 이제 기분 좋게 수업을 시작해 볼까?'


출석체크 하기 전, 강의실을 쭉 스캔해보니 모르는 얼굴이 2명 있다. 한 명은 미리 와서 오후반 청강생이라며 이야기를 했고, 나머지 한 명은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혹시 오후반이세요?"

"아, 네, 케이트 선생님 반인데 회사일 때문에 새벽에 왔어요. 청강되죠?"

"네, 알겠습니다. 진도는 조금 다를 수도 있어요. 여기 수강하는 클래스 반 시간, 이름 적어주세요."

"네."

아...느껴진다. 이 기력없는 듯 퉁명스러운 말투에서 스물스물 스트레스의 기운이 올라오는 듯 하다. 조금 기분좋게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인가.


내가 이끄는 새벽반 강의는 그날 제시된 어순감각을 이용하여 다양한 문장들을 직접 만들어보고 끊임없이 말해보며 응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들을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잘 이끌어 다같이 몰입하며 열심히 하는 에너지를 뿜어내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험한 낭떠러지로 가지 않도록 푸른 초목이 가득한 곳으로 이끌어야 하는 목동과도 같다. 누군가 지루해하거나 집중하지 못하면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이 간다. 새벽에 이불을 박차고 나온 그 정신력으로, '5분만 더 10분만 더!'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온 그 정신력으로, 최대한 집중하여 영어로 말해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것도 강사의 중요한 역할이다.


높은 하이힐에 한 손엔 마이크를 들고 입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영어와 한국말을 오가며) 두 눈 또한 쉴 새 없이 수강생들의 눈동자를 골고루 찾아 집중하며 열심히 하고 있는지 진단하고, '잘 하고 있어요! 좋아요! 한 번 더 자신있게 말해 볼까요?'라는 메세지를 전달한다.


그.런.데. 강의실 정 가운데에 휴대폰을 만졌다가 책을 봤다가...하는 의욕없는 한 영혼이 느껴진다. 미리 예감했던 그 청강생이다. '아니, 지금 다른 수강생들 열심히 하고 있는 거 안 보이시나요? 이 새벽에 공부하고 싶어 오신거 맞죠? 정 가운데 앉아서 하품하고 핸드폰 만지고 이거 아니지 않습니까?' 라는 말이 머릿 속에서 맴맴돌며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지만 꾸역꾸역 밀어 내려보낸다. 대신 눈으로 대화를 시도해 본다. '여기! 여기! 여기를 좀 보세요! 아무리 피곤해도 열심히 해봐야죠? 그렇죠?'


안그래도 크게 말하면 목이 빨갛게 변해서 혹시 몸이 안 좋은 건 아니냐는 질문을 학생들로부터 많이 받는데, 이 순간 거울을 보지 않아도 목부터 얼굴까지 뻘겋게 타오르는게 느껴진다. 저 청강생에게 아무리 눈으로 메세지를 보내려 해 봐도 눈도 마주치기 쉽지 않다. '아...저 사람한테 신경쓰느라 수업 분위기가 냉랭해진 것 같아... 오늘은 학생들한테 칭찬의 메세지나 활용 팁도 많이 주지 못했네..' 이런 생각이 나를 휩쓸고 있다.


'내가 중간 중간 재미있는 이야기를 안 해서 그런가? 그래서 수업이 지루하게 느껴져서 저런 표정인건가? 그래도 강의 시간을 충실하게 사용해야지, 시덥잖은 농담으로 시간을 쓰고 싶지는 않다고...'


'그냥 무시하고 내 수강생들만 신경쓰면 되는 것인데, 이게 뭔가. 왜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 것인가. 원래 저 사람은 저렇게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스타일의 사람일 수도 있다고!'


온갖 필요치 않은 생각들이 머릿 속을 채워버린다. 물론, 이런 수강생을 만나는 것은 나의 일 만은 아니다. 동료 강사 중에는 담당하는 반에 멍-하니 명상을 하는 듯 하거나 수시로 들락날락 하고, 때론 큰 소리로 하품을 하는 수강생도 간혹 있다고 했다. 그런 경우에 자신은 그냥 벽의 시계를 바라보며 수업을 한다고. 아님 지우개로 지웠다는 느낌으로 그 쪽은 눈길을 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아...난 그렇게 하는게 쉽지 않다. 단정하게 드라이한 머리에 뿅!하고 솟아오른 한 두 가닥의 꼬불꼬불 머리카락 같단 말이다. 신경쓰지 말자, 보지말자 하면 더욱 더 눈이 간단 말이다. 왜 그런 이론도 있지 않나. 원래 전혀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던 사람에게 "지금부터 절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 라고 하면, 그 순간 부터 그 사람 머릿 속엔 코끼리만 떠오른다라는 이론.


결국 집중하지 않는, 당췌 무슨 생각을 하고 2시간 동안 있었는지 모를 그 청강생을 신경쓰다가 귀중한 새벽6시20분반의 수업이 맘에 들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오늘 내가 나에게 주는 수업 점수 대략 60점. 물론 다른 수강생들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맘에 들지 않는 수업이었다. 쉣. 쳇. 휴.


예전에 강사교육 할 때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는데, 수업을 하다 보면 이럴 때가 있다고. 한 겨울도 아니고, 그렇다고 에어컨을 튼 것도 아닌데 (누가 썰렁한 농담을 한 것도 아니고) 수업을 할 때 닭살이 돋을 때가 있다고 말이다. 정말이다. 모두 다 나를 바라보며 다함께 진정으로 열심히 하려는 하나의 에너지를 뿜으면서 수업을 따라오는 모습을 보면 갑자기 닭살이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일종의 전율 같은 거다. 이 맛에 아무리 하이힐 신고 8시간 동안 서서 말해도 오랫 동안 이 일을 놓지 않고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기분이 드는 날은 학생들도 수업 결과가 좋다. 그 날 배운 내용은 머릿 속에 콕! 박혀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수업인데, 그 날 청강생처럼 뭔가 집중하지 못하는 심드렁한 길 잃은 양이 레이더에 걸리면 초예민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평소 이상의 에너지를 방출하며 흥분해 버리는 것이다. 에너지 과부하 상태가 된다.


그 날 그렇게 수업을 끝내고 안그래도 씁쓸한데 그 다음 날 들은 이야기.

"메이 선생님, 어제 청강생 받아줘서 땡큐!"

"뭐 가끔 직장인들 그럴 때 많으니까. 그런데 그 분이 수업에 대해 뭐 다른 말은 없었어?"

"어? 아...수업 진도는 딱 맞았대. 그런데 그 새벽반 선생님은 왜 그렇게 화를 내며 수업을 해요? 그러던데?"


아...화 내는 걸로 보였구나...? 예민해서 신경쓰여서 그랬다고. 정 중앙에 앉아서 집중을 안하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고. 그래, 사실 예민해서 화가 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신한테. 혹은 당신을 무시하지 못하고 휘둘리고 있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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