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스승의 날에는 작은 카드만 쓸게요

보내지 않을 스승의 날 편지

by 오복파크


선생님 안녕하세요.


얼마 전, 스승의 날 행사에서 본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양손가락과 양발가락으로는 다 셀 수 없을 만큼 치러왔을 스승의 날 행사일 텐데도 그 자리에 하나도 익숙해지지 않은 당신의 모습이 재미있었습니다. 당신은 스승도, 그루(gru)도 아닌 그저 선생일 뿐이라며, 이번이 마지막 행사라고 예년과 같이 말하셨지요. 행사 며칠 전에는 행사를 준비하지 말라고 전화도 하셨다고요. 당신이 당신의 스승을 '스승'이라 칭하면서 우리에게 가끔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을 떠올린다면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을 스승이라 부르는 것을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매년 스승의 날이 아니라면 어떤 핑계로 진하게 감사함을 전할 기회가 있을지, 부디 눈 질끈 감고 견뎌주셔서 매년 스승의 날 행사가 치러지기를 제자들은 바랄 뿐입니다.


스승의 날이 돌아올 때면 찾아뵙고 인사드릴 스승이 없는 것을 아쉬워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흔히 스승의 날에는 학교 선생님이나 대학 교수님을 떠올리곤 하는데, 학교를 떠난 지는 오래고 대학의 교수님들에게 배운 것들을 써먹으며 살고 있지 않으니 연락드리는 게 영 민망하더라고요. 무엇보다 마음이 그리 가지 않았습니다.


요가를 평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는 저에게도 스승의 날 하면 찾아뵙고 감사인사를 드릴 스승님들이 있어 기쁩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스승의 날인데, 저에게 처음 요가를 알려준 선생님을 찾아가 커피를 얻어마셨습니다. (선생님의 오랜 제자이기도 하지요.) 요가 이야기 조금, 타투를 지우는 이야기 조금, 그가 습관적으로 보는 인터넷 뉴스 속 연예인 이야기도 조금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다정한 성격이 아닌 그가 저를 배웅하면서 보여준 미소는 '내가 말 안 해도 고마운 거 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도 스승의 날 행사를 마치고 혹시 그런 마음이 들지는 않으시는지, 은근히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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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선생님의 나이를 뚝 자른 반절의 나이에도 다다르지 못한 저는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 점점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공기는 점점 오염되어서 마스크 필터로 걸러진 숨을 겨우 쉬면서 다닐 때가 있습니다. 결국 미세먼지를 더 만들어 낼 뿐인 공기청정기를 틀며 실내에 틀어박혀있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고요. 온도는 평년 평월도가 몇 도 높거나 낮아졌는지가 아니라 변해가는 기후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해졌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풍족하다 못해 넘쳐나고, 넘쳐나다 못해 썩고 버려집니다. 뭐든 과하게 들어간 몸은 생활습관병과 만성질환을 끝도 없이 낳습니다. 제대로 배출하지 못한 것들은 엄한 곳에서 엄한 방식으로 분출됩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것보다 각자도생으로 사는 것에 한 표를 보탭니다. 경쟁을 유도하는 교육 제도 속에서 자란 저희 세대는 서로를 경계하고 심지어 혐오합니다. 너무 아파서 삶을 포기하는 또래들을 자주 목격합니다. 가끔 이 에너지가 과하고 넘치고 서글퍼서 곧 터질 것 같이 느껴집니다.


선생님, 제 나이를 두 번 곱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나이를 가진 선생님의 가르침이 참 좋습니다. 선생님은 밖으로 향하던 저의 시선이 안으로 향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셨습니다. 밖으로 향하는 분노, 탓, 행동, 주위들의 날카로운 끝이 구부러져 안으로 향하도록요. 처음엔 나를 찔러 아파하는 날들도 있었지마는 상처들은 전보다 아물었고 지금은 훨씬 편안해졌습니다. 당신은 아주 많은 것들을 알려주시지만 단 하나의 가르침만 남긴다면 그건 '착하게 살라'라고 말해주셨지요. 실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을 조금 흘렸습니다. 그 소박한 진심이 얼마나 크게 다가오던지요.


당신이 낸 많은 책들의 대부분은 흰 바탕에 검은 제목의 디자인이 전부이지요. 전공하지 않은 분야가 잘 팔리면 안 된다고 새 책을 내도 내세우지 않으시고요. 당신이 낸 책과 그 책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당신 그 자체입니다. 당신의 가르침과 행동을 믿고 그 믿음을 증명하려 자꾸 잘 살고 싶어 집니다. 혼란한 시대에 새로 나타난 것들이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당신은 역사로 증명된 오랜 지혜들을 이어가는 통로이지요. 그런 당신의 모습은 낡지 않았고 되려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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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선생님, 실은 저는 위에 마지막 문장을 쓸 때 하나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남성인 당신의 가부장적 면모를 마주할 때마다 저는 막막해집니다. 제가 될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이 붙어있는 유리벽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울인 것으로 착각하고 자꾸 비춰보는 유리벽이요.


모든 것은 '음'과 '양'으로 나뉘고 그것은 우주의 섭리라고 가르쳐주셨지요. 달이 지면 해가 뜨고, 해가 지면 달이 뜨는 것처럼요. 여성은 음, 남성은 양으로 특징을 나누고 그에 따라서 걸맞은 태도나 행동, 선택들을 제시하셨죠. 그리고 그 선택들을 하지 않는 요즘을 안타까워하셨죠. 저는 그 말이 저에게는 낡고 낡아 오래전에 미련 없이 정리한 물건을 당신은 필요로 하면서 닦고 또 닦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음인 여성은 집사람, 양인 남성은 바깥사람과 같은 오래된 공식이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꿰는 혜안을 가진 당신이 하는 말이기에 제가 많이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결론지으며 팔자에도 없는 공부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어떤 부분은 나의 구미에 맞기에 받아들이고 거슬리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는 게 모순적으로 느끼며 나를 타이르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덮어두기도 했습니다. 분노를 삭이지 못한 날에는 혼자가 되는 공간으로 돌아와 씩씩거리며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가부장을 미워하지 않고 가부장제를 미워한다.'라고 쓴 그 글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지금은 그 문장에서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는 숨겨진 뜻이 읽힙니다. 이제 불편한 말을 듣고는 노트에 옮겨 적어 곱씹거나 친한 이들에게 그 말을 옮기지 않습니다. 돌아와 씩씩거리며 글을 적지도 않습니다. 저는 어쩌면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명확히 떠오르는 계기는 없습니다. 당신이 언젠가 술을 조금 마신 날에 들려주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나 한 남성 도반과 툭 까놓고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던 자리에서 '요즘애들'과 '꼰대들'이 바라는 것이 실은 서로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확인했던 순간, 혹은 제가 밥과 같이 먹고 자라는 어떤 문장들이 쌓여서 일거라고 추측합니다. 당신을 이해하게 되자 많은 남성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딱딱하게 자랄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내재된 보호의 욕구와 소통하고 싶은 따뜻한 속내를 몇 번이고 들여다봤습니다.


❝ 내가 수련하는 세계 안에서 계속 불편함을 맞닥뜨리는 것은 나에게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수련은 촘촘히 거른 작은 세계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넓고 포용적인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언젠가 씩씩거리는 몸과 마음을 안고 돌아와 적은 글의 한 문장입니다. 저에게는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항상 '자연적인'차이에 기반한 논리가 사용되곤 했다'며 '어떤 의식 수준에서,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연구하는 가에 따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가능성의 세상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게 마련이다'라고 말하는 수많은 선배와 동료, 후배들이 있습니다.


'삼인동행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걸으면 그 가운데 반드시 스승이 있다', 당신이 읊어준 오랜 말과 같이 그들 역시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고 제가 저일 수 있도록 믿어주고 지켜봐 준 스승이기도 합니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가지는 권리 중 어떤 것은 불과 100년 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걸 당신도 알고 계시지요. 세상은 더 넓고 포용적인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들이 쟁취한 당연함이라는 것도요. 누군가를 이해하고 존경한다는 것이 그의 뜻과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신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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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선생님을 만나고 몸이 많이 건강해졌고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항상 '이랬으면, 저들과 같았으면'했던 가족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아버지를 쓰다듬을 수 있게 되었고 어머니의 투영에 과하게 몰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해주겠지'하고 바라는 마음은 '내가 먼저'하고 움직이는 몸이 되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꾸준히 하는 것이 없는 제가 요가만큼은 오래도록 하고 있어요. 요가를 안내하는 사람이 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저는 평생 요가를 수련할 것입니다. 당신의 가르침 아래에서 배운 요가를요.


스승의 날을 핑계로 당신에게 어리광을 피우며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글을 다 쓰고서는 알았습니다. 이 편지는 당신을 향한 나의 불편한 마음을 정리하고, 맑은 존경으로 나아가기 위한 글이라는 걸요. 스승을 우상화하는 텅 빈 존경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담은 꽉 찬 존경을 보냅니다. 다음해에는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뻔한 내용의 카드를 아쉬움 없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승의 날이라는 단어 속 '스승'은 말에 담는 단어보다는 마음에 담는 소리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제가 한 번도 당신을 스승이라 소리 내어 부른 적은 없지만 당신을 부르는 저의 표현에는 언제나 존경이 담겨있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보다 오래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당신 덕분에 이번 생이 아름답습니다.


2025.5.15.




<참고 및 인용도서>

채식주의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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