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할아버지의 슬리퍼

by 하린

국민학교 1학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2년 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해부터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불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이름이 바뀌던 시절, 우리 집도 큰 변화를 맞이했다.


낡은 한옥집을 부수고, 그 터 위에 새 양옥집을 짓기로 했다.

우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 두 칸짜리 사글세집을 얻어 잠시 거처를 옮겼다.

좁은 방 안에 낡은 가구와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그때 나는 몰랐다.

그 집에 가장 먼저 이별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였다는 걸.


할아버지는 원래 공사장에서 자재 관리 하는 일을 하셨다.

하지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새 집 공사가 시작되자 할아버지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일도 그만두셨다.

그리고는 매일같이 철거된 옛집의 공터를 찾으셨다.

쇠약한 몸을 이끌고 새 집이 세워지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서준이와 함께 사글세집 앞 공터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할아버지가 지나가셨다.

“할배!”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때 문득 이상한 걸 발견했다.

“어? 서준아, 할배 신발 한 짝밖에 안 신었다!”

“진짜네! 누나야, 할배 바보다! 진짜 바본갑다~”

우리는 깔깔거리며 집으로 뛰어 들어가

할아버지의 슬리퍼 한 짝을 챙겨 들고는

그를 따라나섰다.


키득키득.

맨발 한쪽으로 땅을 밟고 걷는 할아버지를 따라

우리는 뒤에서 속닥속닥 웃었다.

“아직도 모른다~ 아직도 모른다~ 진짜 바보다~”

어린 우리에겐 그 장면이 그저 ‘이상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공사장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쌓여 있는 콘크리트와 벽돌을 한참 바라보고 계셨다.

우리는 뒤에서 슬리퍼를 들고 할아버지를 놀렸다.


“할배~ 바보다! 어른이 신발도 안 신고~”


할아버지는 화를 내며 슬리퍼를 뺏어 신으셨고,

우리는 깔깔 웃으며 손을 잡고 돌아왔다.


“엄마, 엄마~ 오늘 할배 진짜 바보였다~

신발 한 짝만 신고 공사장 갔대이. 바보~ 바보~”

나는 어린 마음에 그게 너무 웃겼다.


그 말을 들은 엄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시어머니 간병으로 고생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것이다.

‘설마, 아버님도…?’


집안은 갑자기 뒤집혔다.

고모, 삼촌들까지 그 좁은 사글세집에 모였다.

그리고 밝혀졌다.

할아버지는 중풍이었다.

신발을 한 짝만 신었다는 것도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한쪽 몸이 마비되었고, 뇌까지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그제야 우리는 알았다.

그날의 침묵이,

저벅저벅 울리던 할아버지의 발자국이

얼마나 무겁고 외로운 소리였는지를.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마음이 조여든다.


뒤에서 슬리퍼를 들고 쫓아가며

‘바보’라고 웃던 그때의 내가

참 철없고, 참 미안하게 느껴진다.


만약 지금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슬리퍼를 조심히 신겨드릴 것이다.

그리고 함께 공사장으로 가서

그 집이 지어지는 걸 조용히 바라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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