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한국과 한글을 더 사랑한 미국인
헐버트의 꿈, 조선, 김동진, 육영공원, 독립신문, 선교사, 사민필지
올해(2023년) 1월 26일,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 탄신 160주년 기념 행사가 조촐하게 열렸다. <광주문화방송>의 한글 이름 표기와 관련한 관심이 한글 운동을 하는 분들과 인연으로 이어지면서, 이 행사에 같이 가자는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날 다른 일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1886년 대한제국의 왕립 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처음 조선 땅에 발을 디딘 미국 사람 헐버트 박사는,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고 한국 사람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하늘이 내린 천사'와 같은 인물로 흠모 받고 있다.
창피하게도 나는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참좋은친구, 김동진 지음, 2019년 10월)라는 책을 만나기 전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아펜젤러, 언더우드처럼 선교사로 왔다가 고종의 밀사가 되어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특이한 외국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리대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와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과 만나 얘기를 나누다가 헐버트가 한글을 깊이 연구하고 그 우수성을 세계에 처음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다. 헐버트에 관한 책을 검색해 보니,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이 이 책이었다. 저자인 김동진씨는 제이피모건 체이스은행의 한국 회장을 지낸 금융인으로, 1999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세운 뒤 줄곧 회장을 맡고 있다.
460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책을 다 읽고 나니, 헐버트는 한국 사람이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한국의 은인이라는 걸 진심으로 깨닫게 됐다. 이런 은인은 길이 기억하고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 받는 작업을 더욱 활발하게 벌여야 하는데, 점점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외국인으로서 유일무이하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1950년)과 금관문화훈장(2014년)을 함께 받았으니, 나라가 그의 업적을 나름 높이 인정한 것은 틀림없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 차원의 관심이 점차 흐려지면서 1월 26일 열린 탄신 기념일 행사에 기념사업회 관계자들 외에 정부 쪽 관계자가 아무도 얼굴을 내밀지 않을 정도가 된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의 주인공 헐버트는 갑신정변 뒤인 1886년, 23살의 나이에 조선 최초의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기 위해 처음 조선에 왔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밀사로 파견되면서 일본의 박해로 더는 한국에 다시 입국 할 수 없게 됐지만, 대한민국이 독립할 때까지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국 사람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는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으나, 노환으로 일주일 만인 8월 5일 숨졌다. 그리고 그의 소원대로 한국 땅에 안장됐다.
두 차례(1905년 미국, 1907년 헤이그) 고종 황제의 밀사로 활약했고, 일본의 주권 침탈에 대해 국내외 언론 활동 등을 통해 다양하게 항거한 일 등은 이 책에 자세하게 나온다. 저자인 김동진 회장이 헐버트의 가족, 그가 다닌 대학(다트머스대학, 컬럼비아대학, 버클리대학, 유니언신학대학 등)이 소장한 자료, 그가 기고한 외국 매체 등을 샅샅이 훑어, 아주 꼼꼼하게 정리해 놓았다.
헐버트의 한국 사랑 가운데서도 나의 눈길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그의 한글 사랑이다. 그는 회고록에 "한글을 배운 지 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썼으며, 1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썼다. 한글이 배우기 쉬운 과학적 글인데도 당시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들이 한글을 무시하고 있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일반 백성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는 데 큰 힘을 썼다.
입국 3년 만인 1889년에는 비교언어학적 관점에서 한글을 연구한 영어 논문 <조선어(The Korean Language)>를 <뉴욕트리뷴>에 기고했다. 국어학자인 김슬옹 박사는 이 논문을 "비교언어학적 관점에서 한국 말글의 특징과 가치를 세계에 최초로 알린 글"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육영공원 교사로 있으면서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만들었다. 세계 인문지리 및 사회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최초의 한글 교과서일 뿐 아니라 최초의 교과서이기도 하다. 당시 교육부에 해당하는 학부는 이 책의 유용성을 인정해 한문으로 번역해 출판하는 코미디 같을 일을 했는데, 훗날 국어학자인 최현배씨는 이에 대해 "한글 뒤침의 역현상의 산물"이라고 질타했다. 이것만 봐도 헐버트의 한글 사랑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헐버트는 <독립신문> 영어판을 맡아서 썼는데, <독립신문>이 순한글로 발행된 데는 그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김씨는 추측했다. 그가 서재필, 주시경과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보면, <독립신문>의 한글 발행이 헐버트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김씨는 헐버트의 한글과 관련한 업적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즉, 한글의 우수성을 최초로 국제사회에 소개했고,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를 만들었으며, 한글 창제의 배경을 최초로 학술적으로 고찰했다는 것이다.
헐버트는 한글 관련을 포함해 모두 23권의 단행본(8권의 학술서적, 5편의 소설, 3권의 자서전)과 304편의 기고문을 남겼다. 거의 모두가 한국과 관련한 글이다. 김씨는 이 가운데 <사민필지>, <한국사>, <대한제국의 종말>을 문화유산으로 삼을 정도의 명작이라고 평가했다.
김씨는 헐버트를 "23살에 조선을 만나 63년 동안 한민족과 영욕을 함께한 교육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아리랑 채보자, 선교사, 황제의 밀사, 독립운동가"라고 정의했다. 또 그의 저술 작업을 보면, 그보다 꼭 100년 전에 태어난 실학자 정약용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헐버트가 정약용 못지 않게 고차원적인 지적 활동을 벌였는데, 두 사람 다 방대한 저술을 남기고 지적 욕망에 상한이 없었으며 실용를 중시한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깊이와 폭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한국 사랑, 한글 사랑에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헐버트를 기리는 가장 좋은 길은, 그의 활동과 업적을 길이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이리라. 쓰기 쉽고 배우기 쉬운 우수한 한글이 있는데도 시대 변천에 따라 한자, 일본어, 영어를 숭상하며 한글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헐버트의 한글 사랑은 더욱 널리 알리고 계승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