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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Oct 16. 2024

한글 없이도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었을까?

한강이 노벨문학상이 탄 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감상 또는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문학을 잘 모르는 저는, 그의 수상과 한글에 관해 생각을 해봤습니다. 다음은 시민언론 <민들레>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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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과 한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처음 접하고 쉬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고 놀랍고 경사스러운 소식이어서 그랬습니다. 매일 매일이 만우절인 양 ‘가짜 조작 뉴스’가 판을 치는 세태인지라 의심증이 더욱 예민하게 작동했습니다.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야 그것이 꿈이 아니라 생시라는 걸 알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오사카 총영사 시절(2018년 4월~2021년 6월)에 겪었던 몇 가지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봉준호의 아카데미상과 한강의 노벨문학상



먼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2020년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휩쓸면서 촉발된 일본의 ‘제4차 한류 붐’입니다. 이때는 코로나 감염 사태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접촉을 피해 집 안에 틀어박혀 텔레비전에 코를 박고 있던 시절입니다. 당시 방안에 틀어박혀 있던 일본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즐겼던 오락물이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었고, 덩달아 일본 가정에서 한국 드라마 시청 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석권은 이런 분위기를 일본 사회 구석구석까지 넓고 깊게 확산시킨 촉매제 노릇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한류가 여성과 젊은 층의 전유물이라는 한계를 넘어 전 계층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어간 계기가 됐습니다. 역사 갈등으로 한일 정부간 관계가 싸늘했는데도 일본인의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더욱 커졌습니다. 저는 이를 보면서 문화의 힘이 정치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앞으로 국제 무대에서 한국 문화에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할지 짐작하고도 남는 일화입니다.



교토대는 일본에서 도쿄대 다음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학교입니다. 특히, 이공계 분야 수상자는 교토대가 도쿄대보다 많습니다. 2018년에 교토대를 방문해 당시 야마기와 쥬이치 총장에게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때 야마기와 총장이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신자유주의 학문 풍토와 노벨상은 상극 



그는 연구자가 호기심이 있는 분야를 간섭받지 않고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를 원인으로 꼽은 뒤, 앞으로는 일본의 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더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단언하듯 말했습니다. 너무 충격적인 답변이어서 최근에도 수상자를 내고 있지 않으냐고 되물었더니, 예전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 속에서 공부했던 마지막 세대가 지나면 그것으로 끝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비용 대비 효율’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바람이 대학 사회에 몰아치면서, 당장 무익하더라도 의미 있는 연구를 하려는 풍토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교육 현실로 치자면, 한국의 대학이 일본에 비해 덜하지 않습니다. 훨씬 심합니다. 각 대학의 인문학 계열학과가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고 통폐합되거나 없어진 지 오래고, 교수들은 시간과 품이 드는 연구보다 승진용 점수 따기 논문 생산에만 급급합니다. 교육부는 지원금을 미끼로 대학을 학문연구 기관이 아닌 취업 준비 학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야마기와 총장의 말대로라면 한국의 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내는 건 꿈도 꾸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교육 당국은 핵심 분야를 골라 집중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면 노벨상을 탈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총영사 재직 시절에 한 번은 교육부 출입 기자단이 노벨상이 많이 나오는 이유를 취재한다고 교토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 기자가 대학 관계자에게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보다 영어를 못하는데 어떻게 노벨상을 그렇게 많이 타느냐?’고 질문했다는 얘기를 건너 들었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한국 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는 영영 글렀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강이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탄 것은 그가 효율 지상주의가 지배하는 대학 사회의 바깥에서 자유롭게 활동한 작가이기에 가능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노벨상위원회는 한강의 문학상 선정 이유로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인 산문”을 꼽았습니다. 역사의 트라우마라는 말에서 광주 민중항쟁과 제주 4·3사건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시적인 산문은 작가의 재능을 가리키는 말이겠죠. 그런데 작가의 이런 재능이 온전히 그 혼자의 힘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걸까요?



한글 없이도 ‘한강의 기적’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한강도 수상 발표 뒤 노벨위원회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 문학 작품과 함께 자랐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무수한 선배 작가들의 영향 속에서 생각과 재능을 키워왔다는 고백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글이라는 표현 수단이 없었다면 노벨위원회가 극찬한 그의 ‘시적인 산문’도 탄생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번역이 뛰어나다고 한들 한글로 된 아름답고 섬세한 원래의 표현을 뛰어넘을 순 없었을 테니까요.



저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국 문학의 영광이자 ‘한글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마침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공표한 날을 기념하는 한글날 바로 다음 날에 날라 온 게 ‘신의 조화’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글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는 전령사가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가 한글을 대하는 자세는 어떻습니까? 한글이 태어난 지 578년이 됐지만 아직도 당당하게 적자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상점가는 미국의 거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영어 간판들로 뒤덮여 있고, 대통령을 비롯해 힘깨나 쓰고 배웠다는 사람들은 영어 단어가 하나라도 들어 있지 않으면 문장이나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한글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국민의 언어생활에 가장 직접적이고 큰 영향을 끼치는 미디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교육방송> 등 일부 방송사가 몇 년 전부터 한글날 하루만 생색내듯 한글 사명을 화면에 표시하고 있지만, 한글날이 아닌 다른 날은 영어를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허가장을 받기 위한 꼼수처럼 보여 마음이 불편합니다. 민족신문을 자임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더합니다. 종합일간지 중에서 두 신문만 아직도 한자 제호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한글 씨앗’을 뿌리고 일궈 노벨문학상이라는 꽃을 피워낸 한강의 성취가 한글을 더욱 갈고닦아 풍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문학을 일구고 가꿔온 박경리, 박완서, 이청준, 이문구, 조세희, 황석영 같은 훌륭한 작가들 못지않게, 한글을 만들고 지켜온 분들에 경의를 표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 주시경, 서재필, 호머 헐버트, 최현배, 한창기, 백기완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악전고투하며 한글을 다듬어온 선인들을 전 사회적으로 기억하고 계승하는 바람이 불길 기대합니다. 그것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국 사회에 던져 준 여러 숙제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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