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스물네 시간 중에 온전히 '울기 위한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기도의 방처럼 눈물의 방도 있으면 한다.
꼭 슬퍼서, 화나서, 비가 와서가 아니다. 하루동안 목까지 치밀어 올라온 눈물을 참은 내게 주는 일종의 털어내는 의식은 우는 일이라는 생각 한다. 침잠해서 진한 눈물을 흘리고 싶을 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우는 거다. 하루의 찌꺼기를 공기 중으로 날려 보내는 시간, 눈물로 씻겨 내려간 뿌연 상념을 떼어내고 나면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말개진 처음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털어내어 비워진 미소는 그즈음에 칮아온다. 하루를 보내고 다시 돌아와 잠시 울어보는 일은 잠자리에 들기 전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 속이 후련하게 울어본 기억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울 수 있다. 그리고 울 일은 예나 지금이나 도처에 널려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해에 가족들은 여덟 살 꼬마였던 나만 빼고서 지방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아버지가 지방으로 발령이 났던 거다. 마침 초등학교를 들어갈 여덟 살이었던 나는 학교는 서울서 다녀야 한다는 어른들의 이상한 논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가족들과 생이별을 했다. 서울서 학교를 다녀서 오는 이로움과 가족과 떨어져서 오는 충격을 지금에서야 저울질해보면 단연코 후자의 무게가 크다. 엄마가 없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결국 일 년 후 다시 가족과 살게 되었지만 내 생애중에 가장 많이 울었던 해로 기억된다. 어릴 적 자주 우는 내게 어른들은 빨리 울음을 그치라고 다그쳤다. 나와 눈 맞춤을 해 주지도 않으면서 왜 어른들은 울지 말라고만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텅 빈 골방에서 난 참 열심히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모들이 놀려대면 억울했고, 외할머니의 짜증을 들을 때마다 말 문이 막혔다. 답답함을 해결해 준 것이 우는 거였다. 울다 지치고 힘이 들면 긴 한 숨을 서너 번 쉬었다. 그러면 속상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니 어쩔 수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시침 이를 떼고는 함께 밥을 먹었다.
오십 살이 되었을 즈음,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는데, 그날은 상실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당연히 나의 주제는 어머니의 상실이었다. 어머니의 부재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슬프고 아팠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 큰 모양으로 나를 옭아맸다. 어머니가 생각나면 배가 아팠던 여덟 살 때의 고통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차례가 되어 발표를 했다. 결코 멀뚱히 상실을 이야기할 수 없다. 글을 읽으며 난 울음을 터뜨렸다. 어른이 이성적이지 못하게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우느라고 마지막 문단은 끝내 읽지 못했고, 다른 참가자가 대신 읽어주었다.
그 후 상담자와 울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우는 것일까. 다른 이의 관심을 받기 위해 우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왜 눈물을 흘릴까? 척도로 잴 수 없는 상황인 줄 알면서 '당신은 얼마큼 우나요?'라는 질문을 던져 다른 이와 비교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의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으로, 천천히라도 눈물을 줄여보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아무 데서나 울음을 참지 못하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몇 년간 눈물이 나는 상황을 회피했다. 눈물이 날만한 곳에 가지 않고 보지도 않기로 했다. 그러나 점점 한계가 느껴졌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그래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더 다른 이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울고 싶어지면 다시 울기로 했다.
요즘 어머니를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의 농도는 점점 옅어지고 있다. 그래도 슬픈 마음을 꾹꾹 눌러버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눈물이 나오면 그냥 그대로 흘려보낼 작정이다.
어느 날, 셋째 늦둥이를 품고 찾아온 산모에게서 진통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부랴부랴 그녀의 집으로 갔는데 이미 초등학생이 된 두 아이는 아주 기특하게 엄마의 산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아이들도 나의 손길로 태어나 가슴에 안겼던 아이들이다. 잘 자라 준녀석들이 기특해서 마음이 금방 따끈따끈 해졌다. 나는 졸지에 가족들 잔치에 초대받은 축하객이 돼버렸다. 셋째는 십 년이 넘는 터울에도 불구하고 두 녀석들처럼 순풍 태어났다. 순간, 엄마 가슴에 안긴 동생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던 큰 아이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왜 눈물을 흘리는지 그 안의 모두는 어리둥절했다. 두 손으로 아기를 안고 있던 산모가 한 손을 올려 큰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더 꺼이꺼이 흐느꼈다. 가족 모두는 조용히 녀석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주었다. 애쓴 엄마가 안쓰러웠을까? 조르던 남자 동생이 생겨서 벅차서였을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상황을 눈물로 대신했을까?
"너도 이렇게 태어났단다."그날, 안방의 공기는 세상에서 제일 부드럽고 따듯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흘렀다.
울보 큰아들은 장성해서 작년부터 직장에 다닌다고 한다. 동생이 태어난 순간에 흘렸던 따듯한 눈물을 기억하는, 다른 이의 마음도 보듬을 줄 아는 멋진 청년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요즘 책을 보다가 자주 훌쩍거리고, 티브이의 슬픈 장면에 주르륵, 싱어게인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고 전쟁으로 힘든 사람들 소식에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린다. 시골집 장작불 연기에 찔끔거리고, 찌개에 들어갈 양파를 썰면서 행복한 눈물을 닦는다.
코끝에 전기가 오면서 눈이 촉촉해지고 눈에 물이 가득 차면 떨구는 거다. 소리를 내도 좋다.
'엉엉!'도 좋고 '훌쩍'도 좋다. 언제던, 어디서 던, 울고 싶다면 우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