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퍼튜니티 Mar 13. 2022

너는 하고 싶은 게 있어?

마음이 쓰여서

면접만 가면 불합격 통보를 받는 게 일상이라 만성 취준생 칭호를 받을 무렵 친구 한 명도 취직을 위해 준비하던 시험에 떨어지고 또다시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독서실을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시간이 많은 자의 특권이었다. 우리는 오후 6시쯤이면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디인지, 밥은 먹었고 오늘 무엇을 했는지를 물어보고 저녁 약속을 잡았다. 돈이 없을 땐 그냥 만났고 돈이 있을 땐 밥을 먹었다. 여유가 조금 더 있으면 술도 마셨다. 술을 마시고도 돈이 남으면 자리를 옮겨 다시 마셨다.


서로 주머니에 돈이 있는 날에는 오징어 뼈만큼의 활기가 우리 주변을 감쌌다. 짜장면을 먹게 돼도 탕수육이 붙었고 족발집에 가게 되면 小가 아닌 大자를 주문했다. 든든한 자본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험을 즐기는 용기 있는 기질을 만들어준다. 우주선을 쏴 화성까지 가겠다는 미국의 우주기업 스페이스X도 뒤에서 밀어주는 돈이 있어서 가능한 얘기다. 스페이스X가 용기를 가지고 우주 개척을 꿈꿨다면 우리는 새로운 메뉴를 고르는 데 이 용기를 사용했다. 못 가본 음식점. 안 먹어본 메뉴. 취해보지 못한 술을 고르며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

둘 사이에서 여러 대화를 나눴지만 한 번은 꼭 짚고 넘어가는 대화 패턴이 있다. '만약에'로 시작하는 어휘들이다. 만약에 그때 합격했다면, 만약에 면접에서 다른 대답을 했다면, 만약에 다른 전공이었다면, 만약에 다른 대학을 갔다면, 만약에 대학을 안 갔다면, 만약에 그때 안 헤어졌다면, 만약에 이 동네에서 안 살았다면, 만약에 그때 그 일만 없었다면 같은 식이다. 물론 다른 이야기 전개도 있다.


"만약에 첫 월급을 받는다면 뭐할 거야"


같은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는 가끔 마음을 설레게 한다. 첫 월급을 받으면 한우를 사주겠다고 친구가 말하면 나는 좋은 술을 사주겠다고 답했다. 신나는 기분에 "그래 돈 생기면 여기 말고 다른 집에서 술 마시자"라고 큰 소리로 말해 주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도 빈번했다.


맘먹고 하려는 일이 안 풀리게 되면 하고 싶은 일도 사라지게 된다. 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을 땐 시간이라는 자원이 남아돌게 된다. 풍족한 시간은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생각이 많아지면 이상한 허상에 빠지는 순간이 온다. "하려고 하면 잘 할 수 있는데 마음을 안 먹고 그냥 안 하는 거야" 그리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게 된다.


아마 그런 순간이었을 거다.
영화 '소생크 탈출' 중 모건 프리먼이 가석방 심사를 위해 이야기 하고 있다.

얼굴이 벌겋게 취한 나는 친구에게 "야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모건 프리먼이 가석방 청문회에 출석해서 말하잖아, '저는 사회에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그렇게 말하고선 다시 감옥으로 2평 남짓 네모난 공간으로 들어가잖아. 요즘 나한테 면접이 그래"라고 했다.


술을 더 마시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게 물렁물렁하게 보일 정도로 취한 나는 또다시 "손정의 알아? 일본에 소프트뱅크 창업자 그 사람이 연못에 바위를 푸웅덩 던지면 물결이 출렁출렁하는데 그럼 그걸로 된 거래 만약 버리는 돌이 자신이라고 해도 그걸로 무엇인가 바꿨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니냐고 하더라 너는 하고 싶은 게 있어?"라고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는 내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당장 하고 싶은 걸 이야기했다.


"당구 치러 갈래? 아니면 오랜만에 PC방 가서 스타 해볼까?"


우린 답이 안나오는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당구장에 가기로 했다. 나는 제대로 당구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 못 쳐도 이렇게 못 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당구 실력을 갖추고 있다. 운동에 소질이 있는 친구는 나보다 당구를 잘 쳤지만, 술에 취한 우리는 제대로 칠 수 없었다. 푸르고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충혈된 눈을 비비고 겨우겨우 당구를 쳤다. 친구는 나에게 당구를 알려주기 바빴다.


당구장을 나왔을 땐 밤이 더 깊어졌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PC방을 갔다. 외딴 건물 구석에 있는 작은 PC방. 스타크래프트도 돌아가길 힘들어 보이는 컴퓨터를 켜고 스타를 했다.


"우리 군대 가기 전보다 컴퓨터가 더 안 좋아 보이는데"

"군대 가기 전에 기억나? 그때 2:2로 대결했는데 네가 혼자서 상대편 다 이긴 거"


친구의 이야기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져서 그때의 영광을 다시 보여주겠다며 베틀넷에 접속해 2명의 게이머를 찾아 게임을 했다. 생각과 다르게 게임을 하는 족족 우리가 졌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이길 수가 없었다.


"이제 이것도 못 해 먹겠다. 요즘 다 잘하네" 나는 한마디를 하고 나가자고 했다. PC방을 나와 맑은 공기를 마시면 우리는 괜히 술 핑계를 댔다. 술에 취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게임을 못 했다는 뻔하고 뻔한 패배자의 이야기였다.

먹고 싶은 거 마시고 싶은 거 하고 싶은걸 다했는데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요새 편의점 피자가 맛있더라고 가끔 집에 들어갈 때 편의점 피자 사 가는데 괜찮아 너도 한번 맛봐" 친구가 이렇게 말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우린 냉동 피자 두 조각과 맥주 두 캔을 사서 먹어 치웠다.


나는 "야 오늘 먹은 거 중에 제일 맛있네"라고 말하고 맥주를 몇 모금 마셨다.


그리곤 쓸데없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가끔은 이렇게 지내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느낌이 들어 살면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지 않냐는 불길한 예감도 들어"

"지구는 중력이 있어서 침대에 발 뻗고 누울 수 있는 게 기분 좋을 때도 있어"

"빗소리에 잠에서 깨 다시 잠드는 거 만큼 행복한 건 없어"


대화가 끊어졌을 때 알았다.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켰고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이전 04화 그 피자, 맛보면 눈앞에 별이 돌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