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사두아의 숙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처음 본 방의 상태는 많이 실망스러웠다. 냉장고는 누런 얼룩이 가득한 채 가동이 멈춰 있었고, 창이 작아 햇볕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는 곰팡이의 그것 같은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뭐 2만 원 조금 넘는 방이 다 그렇지 뭐.'
나는 실망스러운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며 짐을 풀었다.
정원으로 나가니 부킹닷컴에서 보았던 익숙한 모습의 수영장이 보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크기가 너무 작았다. 5미터가 될까 말까 한 크기였다. 팔을 한 두 번 접었다 폈다 하면 닿고도 남을 듯싶었다. 내가 이 숙소를 고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수영장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건 수영장이라고 하기에는 작아도 너무 작았다. 딱 우리나라 대중목욕탕의 온탕 정도의 크기였다.
그렇게 두 번째 실망을 하고 있는데 수영장 앞 방에서 귀엽게 생긴 동양인 꼬마 아이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이의 옆으로는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함께 걸어 나오고 있었다. 둘의 대화를 들어보니 일본사람들이었다.
미리 예약해 놓은 캐짝 댄스 공연 시간이 임박했던 나는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공연장소인 멜라스티 해변을 향했다. 멜라스티 해안은 흡사 우리나라 중문 관광단지를 옮겨놓은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중문에 있는 주상절리와 비슷한 모습인 깎아지른 절벽 위로 '멜라스티 해변'이라는 표시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잘 정비된 도로와 건물들은 그동안 보아왔던 발리의 느낌이 아니었다.
캐짝 댄스 공연은 우붓에 이어 두 번째 관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첫 관람 때보다 더욱 이해하며 볼 수 있었다. 개표소에서 나누어 주었던 한글로 된 설명서 역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비록, 구글 자동 번역으로 만든 한국어 설명서였지만, 각 장면 별로 나누어 설명이 된 까닭에 대강의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공연은 아름다운 바닷가의 일몰을 배경으로 한 까닭에 화려한 발리 전통의상의 색깔과 더불어 강렬한 색채감을 전해주고 있었다. 우붓의 공연이 전통적인 느낌이 강했다면, 이곳의 공연은 그 전통에 현대적인 아름다운 색채를 더한 느낌이라 좋았다.
다음 날 조식시간이었다. 식당의 내 옆자리로 일본인 모자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중 아이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하이오!"
아이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엄마를 쳐다본다. 그러자 엄마가 웃으며 아이에게 인사를 하라고 눈짓을 했다.
"오하이오!"
"미안하지만, 이름이 뭐예요?"
다시 아이가 엄마의 표정을 살핀다. 엄마는 다시 이름을 이야기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토모야입니다."
눈동자 까맣고 커다란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수줍게 이야기했다.
"오, 좋은 이름인데?"
아이의 이름을 칭찬하자 그제야 엄마가 나를 쳐다봤다.
"일본사람이세요?"
"아뇨, 한국사람입니다."
"일본어를 잘하시네요."
"그냥 조금 말할 수 있는 정도예요."
"한국 어디에 사세요?"
"제주도요. 당신네들은요?"
"토모야가 한국을 좋아해요. 특히 떡뽂이를 엄청 좋아해요. 저희는 요코하마에 살고 있어요. 도쿄 근처에 위치한. 요코하마 아세요?"
"아, 일본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의 배경이잖아요. 예쁜 도시라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토모야가 검도를 좋아한다고 하자 내 취미인 검도로 화제가 옮겨졌고 어느새 토모야의 장래희망으로까지 옮겨졌다.
"토모야의 장래희망은 뭐야?"
"저는 꿈이 아주 많아요. 피아니스트도 하고 싶고, 육상선수도 하고 싶고, 화가도 되고 싶어요."
"오, 좋은 걸? 화가 중에는 누구를 좋아해?"
"음. 피카소요."
"오, 비싼 그림의 화가를 좋아하는구나?"
아이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짓자 엄마가 웃었다. 엄마는 아이가 1년 동안 가정방문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다는 설명을 해주며 아이의 피아노 치는 동영상을 보여줬다. 피아노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나였지만, 한눈에 봐도 여덟 살 아이치고는 잘 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아저씨한테 싸인 하나만 해줄래?"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토모야가 사인을 한 후 내게 건네줬다.
"나중에 토모야가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면 아저씨가 받은 이 싸인이 굉장히 비싸게 될 거야. 그러니 열심히 노력해서 멋진 피아니스트가 되렴."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유창한 일본어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내 말하기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내 말을 이해 못 한 토모야를 위해 엄마가 천천히 통역을 해줬다.
"예."
그제야 토모야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자신감 있는 대답을 했다.
모자는 오늘 오후 급하게 일본으로 간다고 했다, 갑작스레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태풍이 지나가는 와중에 집을 비워두는 것이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모자가 나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 모자에게 미소를 건넸다. 그리고 언젠가 토모야의 꿈이 이뤄지길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