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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Aug 21. 2024

친절한 하루



어제는 발리의 청담동이라는 스미냑에 다녀왔다.

https://maps.app.goo.gl/Fe2ux4TZcuWBBtQf8



우리나라의 가이드북과 유튜브에서는 보통 꾸따는 명동, 스미냑은 청담동, 짱구는 강남으로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청담동을 몇 번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 스미냑이 구체적으로 청담동의 어떤 점과 비슷한 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곳 스미냑이 다른 곳에 비해 물가가 비싸다는 정도?



어쩌면 한 가이드 북에서 처음 이렇게 비유를 했던 것을 그 뒤로 다른 가이드 북들과 유튜브에서 별생각 없이 따라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비싼 스미냑 거리의 상점들과 음식점들을 그대로 지나 스미냑 비치로 향했다.



도착한 곳에는 발리의 어느 지역보다도 드넓은 백사장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발리는 확실히 동쪽과 남쪽보다는 서쪽 지역이 백사장이 넓게 발달하고 있었다.



나는 샌들을 벗어 가방에 매달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처럼 제대로 인도가 정비되지 않은 이곳 발리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발리에 와서야 우리나라의 인도가 그렇게 넓은 지 처음 알게 된 나였다. 무엇보다도 차도와 인도를 마구 누비는 오토바이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아이들이 웃고 뛰노는 소리와 서핑을 타는 젊은 남녀의 소리, 그리고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클럽의 음악들이 백사장을 걷는 내 발걸음을 절로 가볍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신나게 걷다 보니 어느새 내가 서핑을 배우고 있는 꾸따 해변에 도착했다. 하지만 오늘은 서핑 수업도 없는 날이었다. 마침, 배가 출출했던 나는 식사도 할 겸 비치워크 쇼핑몰을 찾았다.



가볍게 식사를 한 후,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에 들렀다. 사향고양이의 대변에서 골라낸 원두로 만든 것으로 유명한 루왁커피 진열대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젊은 여직원이 내게로 와 말을 걸었다.



"재패니즈? 니혼노 가따 데스까?"



그녀가 내가 일본인인지를 묻고 있었다. 아마 일본어를 잘하는 직원인 모양이었다.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그녀가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일본어로 한국인이라는 대답을 해줬다.



"이이에, 칸코꾸진 데쓰."



그러자 그녀가 와락 웃었다. 그리고는 내게 빠른 일본어로 진열된 루왁커피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일본어 속도는 원어민에 가깝게 빨라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강의 내용은 이러했다.



"이곳에 진열된 발리의 커피 대부분은 일본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이 루왁 커피만큼은 일본에 수출이 되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많은 일본사람들이 기념품으로 이 제품을 사가고 있어요. 어때요? 하나 구입하시죠?"



어차피 루왁 커피를 구입하려고 마음먹었던 나였던지라 그녀에게 평소 궁금한 사항들을 물었다. 그녀가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 나 역시 간단한 일본어로 물었다.



"이 드랍 커피와 파우더 커피 중 많이 팔리는 것은 어떤 거예요?"



"드랍 커피가 더 맛있어서 많이 팔리고 있어요. 저는 이 드랍커피 8개짜리를 추천해요. 부담이 되시면 아래 5개 짜리도 있으니까 그걸 구입하셔도 되고요."



"아, 예. 그럼 이 8개짜리로 구입할게요."



그녀가 내게 루왁커피를 건네며 계산대를 가리켰다.



"아리가또우 고자이마쓰."



그녀가 내게 웃으며 일본어로 감사인사를 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친절에 기분은 좋았으나 그녀가 나를 끝까지 일본사람으로 오해한 것 같아 마음이 찜찜했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 중간에



"나 진짜 한국사람이라고요!" 라며



정색을 하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덕분에 좋은 제품을 소개받았으니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슈퍼마켓 옆에는 한 소녀가 에그타르트를 팔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그녀는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나는 얼른 시선을 거뒀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에그 타르트 정말 맛있어요. 한 번 드셔보실래요?"



그녀의 한 번 드셔보시라는 말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여기도 시식이 있는 건가?'



"그럼 조금 맛볼 수 있을까요?"



그녀가 미소를 만면에 가득 띤 채, 진열대에 있던 커다란 에그타르트 한 개를 꺼냈다. 시식하기에는 너무 크다 싶어 의아했는데 그녀가 그것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역시 내가 오해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마트 같은 시식코너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기쁜 표정으로 열심히 포장을 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안 사요."라고 말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늦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에그타르트 값으로 3,000원을 건네고 자리를 뜨려 하는데 그녀가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포장된 것의 반만 한 에그타르트를 꺼내 내게 줬다.



"이건 공짜예요."



기분이 좋았던 그녀가 내게 서비스를 준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그 에그타르트를 손에 쥐라고 하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왜 찍으신 거예요?"



"공짜로 손님에게 물건을 줄 때에는 회사에 보고를 해야 하거든요."



그녀의 친절과 함께 먹은 에그타르트 두 개는 그동안 내가 먹었던 어떤 에그타르트보다도 맛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낮에 걸어온 해변가를 거슬러 걷기 시작했다. 해변의 분위기는 한낮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빨간색 물감이 어두워가는 군청색 하늘 위로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



그 거대한 그림을 배경으로 젊은 연인이, 행복한 가족들이 삼삼오오 서 있는 모습이 오래전 내셔널 갤러리에서 봤던 '윌리엄 터너'의 작품들처럼 몽환적으로 다가왔다. 그야말로 자연은 위대한 예술가라는 말이 절로 실감 나는 장면이었다. 자연 역시, 아까의 그녀들처럼 내게 친절을 베풀어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저녁노을과 더불어 그렇게 나의 발리 여행도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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