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리그, 호주 커피
'커피 마실래?'
'아, 괜찮아요. 카페인을 마시면 잠을 잘 못 자서.'
'뭐? 커피를 어떻게 안 마실수가 있어!'
그렇게 그들의 동공이 활짝 열렸다. 물론 장난이라고 했지만 조금은 진담이었으리라. 술을 안 마시는 건 용납할 수 있어도 커피는 안 돼! 음식 편식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면서 커피 편식이 놀랄 만한 일이라니. 호주인에게 커피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들만의 커피에 자부심과 애착이 강한 호주인들. 호주 커피는 드립 커피보단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커피 메뉴가 발달해 있다. 가령 내가 가장 즐겨 찾는 플랫화이트 같은. 1950년대에 커피를 사랑하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그들이 가져온 에스프레소 문화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호주 커피 문화가 탄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플랫화이트도 호주에서 시작한 걸로 알려져 있다.
호주인들의 커피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엄청나다는 건 호주에 한 번이라도 가본다면 쉽게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다. 호주에서 스타벅스는 찾아볼 수가 없다. 스타벅스는 이미 그들만의 커피 문화가 정착한 호주에 미국식 커피를 그대로 들여왔다가 큰 손실을 봤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을지도 모른다. 대도시에는 몇 군데 남아있지만 시골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거리를 둘러봐도 개인 카페들 뿐인데 모든 카페가 이상하게도 장사가 잘 된다. 로컬 비즈니스를 지원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한몫했겠지만 맛과 품질이 중요해 스페셜티 원두를 취급하는 카페 매장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또, 여기 호주 카페의 특징이 있는데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나라답게 차이라떼, 더티차이, 마차라떼 메뉴를 어딜 가나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다양하게 시도해 보는 걸 좋아해 어떤 날은 차이라떼, 어떤 날은 마차라떼, 어떤 날엔 카푸치노를 마신다. 하지만 대부분의 오지는 항상 같은 메뉴를 마신다. 내 짝꿍도 마찬가지다.
그의 모닝 루틴은 단골 카페에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어나자마자 차로 10분 떨어진 단골 카페를 찾아 바닐라 시럽을 넣은 아이스 라떼를 주문하는 것. 바리스타와 익숙한 듯 인사를 나눈다. 바리스타는 당연히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고, 서로 사사로운 일상을 나눈다. 물론 그의 아침 루틴에 자주 동행하는 나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앉아 커피를 조금 마시다 걷기 시작한다. 여러 샵들을 지나치고 우연히 친구를 마주치기도 한다. 짧게 근황을 나눈다. 그렇게 몇 블록을 지나 빙 둘러 다시 카페로 돌아온다. 한 번 더 반복, 그렇게 두 바퀴를 도는 것이 그의 모닝 루틴이다.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가 많지 않은 그에게 이 루틴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스몰톡을 하며 스스로에게 활력을 주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작업이다. 가끔은 칠리라는 강아지를 데리고 오는데 꼭 펫밀크를 추가로 주문한다.
스무 살 때부터 패스트푸드점을 시작으로 편의점, 카페, 수학교재제작, 주차장조사, 학원 강사, 식당, 호텔 등 오랜 시간 단련된 서비스업 아르바이트 경험을 바탕으로 아무리 바빠도 환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곤 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은 드물거든! 오늘은 어때? 날씨 좋지? 먼저 운을 띄워주면 말하는 거 좋아하는 호주사람들 덕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진다. 나 너 바다에서 본 것 같아. 티트리에서 서핑했지? 먼저 알아봐 주기도 하고 알아봐 주는 손님도 있다. 1년 남짓 같은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단골손님들을 기억하게 됐다. 매일 2시쯤 와서 쇼케이스에 전시된 롤 두 팩을 사가는 손님, 매번 같은 메뉴를 주문하는 쇼핑센터 안 케밥집 직원, 선글라스를 머리에 꽂고 혼자 바에 앉아있다 가는 손님. 호주에서 서버로 일을 하면서 깨닫게 된 건 내가 스몰톡을 좋아한다는 거다. 모자 예쁘다, 어디에서 샀어? 칭찬도 하고 반대로 너 미소가 아름답다, 정말 예쁘다. 칭찬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면 힘들어 땡땡 부어있던 내 종아리가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다. 그렇게 손님들과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게 서버로 일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생각해 보면 단골이라곤 없었던 서울에서의 삶과 다르게 호주에서는 단골을 만들게 됐다. 자주 가는 카페, 자주 가는 마트, 자주 가는 공원, 자주 가는 서핑 스팟.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던 똑같이 돌아가는 일상이 오히려 호주에서 이방인인 내게 꽤 큰 소속감을 주었다. 가족도, 나를 잘 알고 있는 친구도, 모국어인 한국어도 통하지 않는 모든 것이 낯선 곳이기에. 오히려 서울에서 새로운 자극을 추구했던 건 나를 둘러싼 가족, 친구, 집, 동네가 주는 안정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짝꿍은 일반 풀크림 밀크를 사서 그냥 마시기도 할 정도로 우유를 정말 좋아한다. 낙농업이 발달된 호주에서는 우유도 훨씬 고소하고 달다. 반면 한국 우유는 계절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고 한다. 여름철 더위로 인한 소의 스트레스 때문에 유지방 함량이 떨어진다고. 일반적으로 유지방 함량이 높을수록 맛있게 느껴진다. 다음 주부터 라떼아트 수업이 시작된다. 부드러운 밀크 폼 위에 예쁜 로제타를 그리고 싶다. 고소한 풀크림 우유가 들어간 나의 단골 커피, 플랫화이트를 한 잔 하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