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이 세계에서의 우울과 그 특효약"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절망은 분명 병이며, 심리적 질환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우울이라고 부릅니다.
우울한지도 모르면서, 자신이 우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또 자신은 우울한 것은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면서, 우리는 우울에 빠져 있습니다.
살아있는 실감이 없는 속에서 죽음을 향해서만 하루하루 다가갑니다. 그러니 죽음은 더 두려워집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에 대한 구원책으로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신앙은 견고한 믿음의 힘으로 모든 것을 안정되게 만드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키르케고르의 신앙은 개인이 서있는 근간을 마구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개인을 더욱더 디스코팡팡처럼 흔들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신앙이란 곧 불안입니다.
그리고 불안만이 개인이 절망을 벗어날 수 있는 그 길입니다.
이것은 훌륭한 정신생리학입니다.
우울의 특효책은 불안입니다.
과잉된 안정에의 집착이 우울을 낳습니다.
"웃기고 있네.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안정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데 우울한 건 어떻게 설명할건데?"
요즘 유행하는 슬로건인 "무식해도 용감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하자!"를 따르는 이들은 물론 이런 반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무식해서 우울하다는 답변이 가능합니다.
진짜 무식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그 일입니다.
무식하면 이처럼 자기폐쇄적이 됩니다. 자기의 무식함이 탄로나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자기폐쇄적 상태는 역설적이게도 이상한 것들을 전파하는 사기에 너무나 취약한 상태가 됩니다.
"인터넷에 써있다면 그건 전부 진짜다." by 알버트 아인슈타인(전구의 발명가)
오늘날의 이 황금률을 따라, 인터넷에서 주워본 이상한 이야기들을 진리처럼 더욱 수호하게 됩니다.
인터넷의 활용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가 정보소비의 주체라는 환상을 품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폐쇄적인 상태는 자기의 능력만 믿는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주체적인 능력으로 직접 검색해서 찾아낸 정보인 것 같으니, 그것은 진정한 것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게 됩니다. 아무리 이상한 이야기라도 자기가 주체적으로 소비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 이야기는 진리성의 권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똑똑한 척하며 사기를 경계하는 이들이 가장 사기를 당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가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무식하지 않으려고 정보의 주체가 되려고 한 결과 진짜로 무식하게 드러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러니 더욱더 자신이 얻은 이상한 이야기들을 수호하고자 하는 마음은 커집니다. 그 이야기들을 정답으로 삼아, 정말로 그것이 정답이었음을 어떻게든 자기 삶에서 증명해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래야 자기가 무식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이렇게 살아서 오늘날의 우리는 우울해졌습니다.
이상한 이야기들로 만들어진 '정답'이라고 하는 것을 과잉된 안정의 소재로 삼아 안정된 현실을 얻으려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보니, 그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고, 또 그렇게 이룰 수 없는 자기의 능력에 절망하며, 우리는 더 깊은 우울감에 젖어 들었습니다.
안정은 자원의 유무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자기와 세계의 관계방식에서 비롯하는 문제입니다.
이 세계를 일부러 굴절되게 지각함으로써 자기를 드높이려는 의도를 가질 때, 또 그렇게 세계보다 드높아진 자신의 상태를 세계로부터 안전해진 상태라고 생각할 때, 이것이 과잉된 안정에의 추구가 됩니다.
온라인상의 온갖 이상한 성공신화들, 마법의 원리들, 심리학의 비밀들과 같은 이야기들이 세계를 굴절되게 지각할 수 있도록 돕는 환각제 같은 기능을 합니다.
자신을 과잉되게 안정시키고자 우리는 뽕에 취합니다.
뽕에 취한 그 결과가 절망입니다. 심대한 우울입니다.
뽕을 끊으라고 하면 몸이 덜덜덜 떨립니다.
불안이 시작됩니다.
보잘 것 없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세계에 대해 무력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서 생겨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제파악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87에서 0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에 대해 무서운 엄마 앞에서처럼 무력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자기 엄마처럼 얕잡아보던 일을 이제야 멈추는 것입니다.
무식하니 용감하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식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배우고자 하는 이는 어떤 경우에라도 절대로 무식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배우고자 하는 이는 몸이 부르르 떨립니다.
환희로.
그에게는 불안이라고 하는 것이 설렘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습니다.
불안은 배움이 시작될 수 있는 대전제입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인간이 그 위에 놓여 있는 표현 그대로의 대전제입니다.
인간은 자기 삶에 대해 배워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간조건입니다.
불안은 인간이 자기 삶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근본조건입니다. 인간조건을 충족시키는 근본조건입니다.
이러한 인간조건을 포기하고 인터넷 환상세계의 고블린처럼 굴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우울입니다.
인간이고자 하지 않으니 이 세계에서 인간으로 사는 일이 우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이 우울하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들은, 실은 답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
트럭에 치여 이세계로 전생하는 것이 그 답입니다. 그러나 죽는 것이 아플까봐 두려워 그 답을 실행하지는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세계 전생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들에게는 다른 답의 탐색이 시작부터 기각됩니다.
어떻게 하면 아프지 않고 인생을 리셋하여 진정한 나의 환상세계에서 치트능력자인 어둠의 귀공자로서 새출발을 할 수 있을까, 오늘도 자기폐쇄적인 방구석에서 망상만이 증대됩니다. 무식한데 용감한 용자들을 통해 망상은 절망을 싣고 유튜브를 통해 링의 사다코처럼 더 널리 전염됩니다.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불안만이 그 특효약입니다.
모범적인 정답을 모방하여 익히는 학습이 아니라, 자기와 세계의 근본적인 관계방식을 변화시켜 정말로 자기의 삶을 배우는 일만이 이 절망적 우울의 치유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