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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어서 와 노화는 처음이지? 01
토비콤 사러 갑니다.
by
바인
Jan 2. 2022
안경을 세 개나 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제일 아쉬운 것은
식어가는 커피도 아니고
슬슬 고파지는 배도 아니고
차 안에 두고 온 노트북용 안경이다.
(독서용. 일반용은 옆에 있다. 왜 항상 필요한 건 옆에 없을까?)
오른쪽 눈은 마이너스 왼쪽 눈은 0.5 정도.
0.5라는 알량한 시력을 가진 왼쪽 눈이 그나마 사력을 다해 항상
고생 중이다.
시력측정판 제일 위에
우뚝하게 그려진 새가 개처럼 보이는 내 오른쪽 눈은
그저 달려있는 게 고마운 지경이다.
그나마 제 노릇을 하는 왼쪽 눈 덕분에 전체적으로 뿌연 가운데도 글자들이 보이긴 보인다.
봉숭봉숭한 안개꽃 사이에 동동 뜬 장미꽃처럼 글자들이 로맨틱해
보인다
내 뿌연 오른눈 덕분인데 글자가 로맨틱해서 어디에 쓰겠는가.
영 불편할 뿐이다.
주차장에 갔다 올까.
뇌의 2%는 오로지 그 고민에 집중되어 있다.
갈등하느라 안 그래도 궁핍한 뇌 활동이 더욱 더뎌진다.
결국 안 간다.
귀찮다는 것은 움직이기 싫다는 마음의 결론이다.
어차피 노화는 느림을 동반한다.
두줄
쓸꺼 한 줄 쓰지 뭐.
늙으면서 제일 먼저 터득한 진리는 빠른 포기.
원래도 눈이 나빴다.
오른눈이 난시와 근시를 동시에 갖고 있어서 온몸의 기관 중에 평생 아무 일도 안 하면서
꼬박꼬박 에너지를 써먹는 애물단지였는데 기특한 왼눈이 평생 두배로 일해서 그 자리를 메웠다.
그 결론은 왼쪽 눈의 과로사.
(반전 해피 엔딩 따위는 없다. 얄미운 언니보다 고생한 동생이 항상 먼저 죽는다.)
문제는 갱년기와 노화가 함께 오면서부터다.
안 그래도 성치 않은 눈들이 노화라는 폭탄을 맞았다.
40대 초반에는 모든 것이 미미했고 노화의 가능성은 알았지만
주리가 틀려도 발설하면 안 되는 독립군의 비밀처럼 다들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마주하기 두려울 땐 모른 척이 수였다.
그때는 몸도 비교적 성했다.
하지만 4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온 몸이 아우성이다.
모른 척이고 뭐고 불편해서 살 수가 없다.
마치 적벽대전 화살 쏟아지듯 다종 다양한 ‘노화’들이
전신 사방에서 비 오듯 쏟아지고 있다.
어서 와 노화는 처음이지? 어 처음이다.
사는 게 처음인데 뭔들 두 번째랴.
처음엔 눈에 뭐가 낀 줄 알고 인공눈물도 넣어보고 비벼도 보고 우왕좌왕했다.
피곤해서 이러나?
멀리 있는 게 안 보이는 건 내가 몽고인이 아니니까 당연하지.
그동안 눈을 너무 혹사했어.
그러나 가까이 있는 글자들이 아까 그 안개 꽃다발 사이에 묻히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된 그 증세가 생활 모든 분야에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기까지는 채 6개월도 안 걸렸다.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이 돋보기를 헤어밴드처럼 머리에 이거나 안경 줄로 목에 걸거나
한시 반시도 몸에서 안 떨어트리길래 왜 저러나.. 했는데 그게 다 살다 보면 그럴 만한 필요가 생겨서 그랬던 거다.
사무실이나 집에서는 안경이 근처에 있으니 필요할 때 쓰고 벗으면 되는데
마트나 거리에서 느닷없이 마주치는 ‘작은 글씨’들이 문제다.
도대체 왜!! 식료품에 붙어 있는 라벨의 글씨들은 모두 같은 사이즈 일까.
가장 중요한 제조일자나 유통기한이나 뭐 이런 거는 62 폰트로 좀 써주면 안 되는 걸까?
튜브에 담긴 제품들은 한술 더 뜬다.
유통기한이 꼬리 쪽 플라스틱에 개미 똥꾸멍만 하게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환장한다.
장 보러 갈 때도 안경을 챙겨야 하나 보다.
손이 무거운 게 싫어서 항상 주머니에서 지갑이랑 핸드폰만 달랑 챙기는 내 버릇 때문에
낭패
보기를 여러 번이다.
마지막 방법이 있기는 하다.
폰으로 찍어서 확대해서 본다고 누가 우스개 소리로 한 건지 자기가 진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까지 해야 하나.
아직 시도해본 적은 없다.
꼭 사야 하는데 진짜 궁금하면 이제 진짜 마지막
방법이 있기는 있다
이거 역시 독립군 비밀인데
영 궁하면 눈물을 머금고 입을 떼어야 하리라
저기... 총각.... 미안한데 여기 뭐라고 써있수?
네~~ 할머니. 이 제품은요..블라블라블라.. 아셨죠? 만수무강하시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언젠가 백화점 엘리베이터 하행선에서 내 두 칸 아래 서있던 중년 아주머니 핸드폰 글씨가 하도 커서 그 내용이 나한테도 빤히 보이던 게 생각났다.
그때 내가 키득키득 웃었던가 신기해했던가.
아... 내가 2-30대 저질렀던 모든 방자한 행동들이 다 나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모양이다.
흠.....
각오와 체념이 동시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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