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기적으로 취항하지 않는 노선인 자카르타를 갔다.
회사 비행기 중정비를 맡기러 갔는데, 여기서 중정비란 비행기 정비에서 최상위 단계의 정비로서 쉽게 말하면 비행기를 여기 뜯어보고 저기 뜯어보고 해서 자세하게 살펴보고 정비하는 대장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비행기를 맡기러 갈 때도 기본적인 것들은 제거가 된 상태로 간다. 예컨대 화장실 휴지가 없다든지(당연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승객들이 안 계시니까 말이다.), 물품들을 보관하는 카트가 없다든지.
비행기에 있는 것이라곤 기장님과 나, 그리고 우리가 먹을 밥과 물이었다.
브리핑실에서 브리핑을 마치고 국제선을 갔다. 김포에서 자카르타까지는 비행시간이 약 7시간 정도. 일반적인 경우라면 내가 타는 비행기는 승객을 모시고 자카르타까지 갈 수가 없다.
비행기가 무거워지며 연비가 떨어지고, 그렇다면 연료가 부족하여 멀리 날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행 준비를 하며 본 지금 현재상태의 비행기 무게는 지금까지 737을 타면서 처음 본 가벼운 무게였다.
기장님께서도 자카르타로 가는 것은 처음이라 하셨고, 나 또한 처음이었다.
이번 비행을 하면서 기대됐던 것 몇 가지가 있었다.
1. 비행으로 적도를 지나간다는 것.
내가 타는 비행기는 연료 특성상 보통 북반구에 있는 나라들을 다닌다. 승객을 모시고 가는 취항지 중 가장 남쪽이라 하면 우리 회사에서는 괌이 되겠다. 하지만 괌도 북반구에 있는 섬이었기에, 남반구에 있는 자카르타로 가는 것은 설레는 일이었다.
왜 설레는지 물어보신다면, 사실 약간 민망하지만... FMC(비행기에 있는 컴퓨터)에서 비행기의 현 위치를 나타내주는 화면에서 N으로 시작하는 위도가 S로 바뀌는 장면을 직접 목격할 수도 있고, 교과서에서만 보던 적도는 구름이 많고 날씨가 좋지 않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쉽게 말하면 남들 하나도 안신기해 하는 걸 혼자 신기해서 설레는, 뭐 그런 말이다.
2. 낮 시간에 필리핀, 브루나이 상공을 지나갈 수 있다.
우리 회사는 낮시간에는 주로 일본과 국내선, 그리고 밤에는 동남아지역을 다니기 때문에 늘 어두컴컴한 상공을 지나 목적지로 갔다. 그렇기에 너무 아름다운 대만의 밤 경치나, 야간에 반짝거리는 필리핀 도시의 불빛들은 볼 수 있지만 낮시간대의 그곳들이 어떤지는 본 적이 없었기에 궁금했다.
출발은 오전 9시였으니 아름다운 섬들을 선명히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도 쉽게 말하자면 별것도 아닌 건데, 안 해본 거 해서 신났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출발,
이륙 후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바쁜 일들은 대충 끝났고 기장님께서는 나보고 먼저 식사를 하라고 배려해 주셨다. 나는 기장님께 조종과 관제를 맡기고 갤리로 나와서 아이스박스 안에 들어있는 돌덩어리처럼 굳어있는 나의 밥을 꺼내는데, 아차.
'오븐 어떻게 키지?'
걱정 말자, 나는 아내가 객실 승무원이기에 아내에게 물어보면 된다.
물론 상공 4만 피트에서 인터넷이 터지는 경우에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아내에게 미리 교육받고 왔어야 하는데, 이걸 어쩔까 고민하다가 먹고 죽을까 싶어 커버를 열었다. 그 안에서 나를 환하게 반겨주고 있던 것은 마치 전자레인지의 도움을 받기 전 햇반과 같았다.
내 눈앞에 놓인 것은 수분기 하나 없이 딱딱한 밥과 비행기 바깥온도보다 차가워 보이는 스팸과 돼지고기 었다.
도저히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기장님에게 갔다.
"기장님, 혹시... 오븐 어떻게 사용하는지 아십니까...?"
"오.. 오븐....?"
"아닙니다...."
아내의 직업에 다시 한번 감사와 존중, 존경과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괜히 비행기에서 이것저것 만졌다가 비행기 홀라당 태워먹을 것 같아서 그냥 먹기로 결심하고 앉았다.
그렇게 나는 전자레인지나 오븐이 없던 시절, 딱딱한 밥조차도 감사한 마음으로 드셨을 조상님들을 생각하며 먹었다. 물론 한 반쯤 먹고 나니 목이 막혀 넘어가질 않았다.
낮에 보는 필리핀 상공은 정말, 너무 아름다웠다.
필리핀에 섬이 이렇게 많았나?
바다의 색은 파란색이라는 단어로만 설명하기 부족할 정도로 다양한 색을 갖고 있었고 수많은 섬을 보며, 돈 많이 벌어서 이 근처에 내 섬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싶을 정도로 경이로웠다.
적도에 가까워질 때쯤, 역시 배운 대로 적도수렴대는 구름이 많았다. 수증기도 많고, 비행기 밖으로 나가보진 않았지만 후끈하는 "느낌도" 있었다. (물론 외기온도는 영하 56도쯤이었다.)
비행기 컴퓨터에 현재 위치가 나오는 페이지를 펼쳤다.
N 00.00.7
N 00.00.6
N 00.00.5
N 00.00.4
N 00.00.3
N 00.00.2
N 00.00.1
...
그리고 드디어
S 00.00.1
S 00.00.2
S 00.00.3
S 00.00.4
S 00.00.5
캬....
내가 말했다.
“기장님!! 이제 화장실 물 내리면 반대로 내려가지 않습니까!?”
“그러취!!”
물론 안 계시겠지만, 혹시나 대형기를 타시는 기장님들께서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어느 소형기 부기장의 촌스러운 취미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비행시간은 역대급으로 많이 나왔지만, 너무 좋은 기장님과 가서 그런지 정말 좋았다. 승객이 없으니 부담도 덜하고 처음 보는 것들 투성이라 재미도 있었다.
자카르타에 도착하여 기장님과 간단하게 밥을 먹으며 아내에게 연락을 했다.
"여보, 나 잘 도착했고 기장님이랑 이른 저녁 식사 하고 있어."
아내에게 답장이 왔다.
"오빠! 고생 많았어. 나는 지금 늦은 조식 먹고 있어."
자카르타는 오후 4시쯤, 아내가 있는 로마는 오전 11시었다. 너무 웃겨서 기장님에게 말하니.
"아주 부부가 글로벌하다 글로벌해."
식사를 마치고 기장님께서는 방으로, 나는 혼자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려고 호텔 1층 로비에 있는 바로 갔다.
아, 그전에.
약 네 달 전, 맥주를 끊겠다는 다짐에 관한 글을 하나 썼다. 물론 제목에는 '아마도'라는 단어를 덧붙히며 나의 나약함을 강하게 드러내는 글이다.
비록 삭제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글에 맥주 이야기가 나온다면 독자분들께서는 어느 무지몽매한 부기장의 나약한 의지라고 가엾이 여겨주시어, 인간은 늘 실수를 반복하고 지키지 못할 약속도 하고 사는 거라고,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아무튼,
로비로 갔다.
맥주를 한잔 시키고 바텐더에게 물었다.
"이 호텔에 어느 어느 항공사가 묵어?"
"싱가포르, 에미레이츠, 중국동방항공, 사우디아라비아 항공 정도?"
"오 그렇구나."
"크루니? 크루면 맥주 할인도 돼."
"오? 진짜?"
"but only 싱가뽀르 크루."
"낫 이븐 에머렛?"
"온리 싱가뽀르."
"낫 이븐 사우디 아라비아?"
"온리 싱가뽀르."
그렇게 이번 비행으로 느낀 두 가지.
1. 아내에게 오븐 사용법을 배우며, 더 잘해야겠다.
2. 싱가포르 항공사 복지 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