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얼마 전 승무원으로서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퇴사를 하였다. 따라서 '승무원 아내와 부기장 남편'이라는 매거진 제목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이 매거진의 마지막 글을 작성하려 한다.
아내와 함께 갖고 있는 비행에 관한 수많은 추억들 중, 어떤 장르로 마무리를 할까.
슬픔, 이것은 마지막이라는 단어와 너무 잘 어울리기에 싫다.
아쉬움, 이것 또한 마지막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린다.
공포, 공포스러운 일이 있었나. 아, 내가 아내에게 말도 안 하고 코인 들어간 날...?
하지만 마지막 글은 역시 행복 장르가 낫겠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은 행복한 것이 좋다. 안 그래도 힘든 일상일 텐데, 굳이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더 피로한 것을 일부러 애써 찾고 싶지가 않다. 가끔은 그냥 생각 없이 편하고 나른한 것이 땡길 때가 있다.
그런 느낌으로다가 이번 글을 작성해보려 한다.
퇴사 전 아내와 비행이라는 주제로 최근 들어 가장 행복했던 기억, 나의 퇴사일로부터 일주일 전 아내가 나의 괌 레이오버를 아내가 따라온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비행 전 날, 같이 가는 기장님께 아내가 승객으로 탑승한다는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기장님께 배려받는 느낌이 드는 답장을 받았다.
비행 당일, 아내와 함께 출발을 하였고 수속을 도와주려 하자 아내는 나보다 더 전문가라며 비행 준비 하러 가보라 하였다. 브리핑실에 도착하였을 때 기장님께서는 아내분 잘 챙겨드리고 왔냐고 물어보셨고, 브리핑이 끝나고도 먼저 일어나서 아내분 챙겨주러 가라고 하셨다. 무심하고 건조한 말투의 기장님이셨지만, 그 속으로 챙겨주시는 마음은 온전히 전달이 되었다.
내가 이전 회사에서 탔던 보잉 737이라는 비행기는 칵핏에서 객실 온도 조절을 할 수가 있었다. 아마 그날이 내가 온도조절에 가장 예민하게 신경 쓴 날이 아니었을까. 그날은 기장님도, 기류도, 그리고 같이 비행을 한 객실 사무장님을 포함한 승무원분들도 너무 좋았다. 특히 사무장님께서는 아내가 탔다며 굳이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고 하셨고,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내가 아는 단어로는 감사의 표현이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잘해주셨다.
괌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잘 보냈다는 생각이 들까 고민을 해봤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랑의 절벽을 가볼까.
미국에서 비행하고 있는 부기장 친구인 Jason에게 추천받은 Pagat cave를 가볼까.
아니면 해변가를 걸으며 물장구를 칠까.
나와 아내의 여행 성향상, 행복이라는 주제로 여행을 하라면 아마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계획적이고, 빠듯하고, 일정에 맞춰 열정적으로 여행을 했을 때도 즐거웠지만, 우리가 정말 행복했을 때는 여행지에서 그냥 동네 거리를 걷다가 예뻐 보이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을 들어가고, 그곳에서 의도치 않은 인연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같다. 심지어 신혼여행을 할 때도 호텔과 항공권만 예약하고 가서 지금도 그리워하는 노르웨이가 되었으니 이것이 행복이 아닐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가끔은 굳이 무언가 하여 채우려고 하는 것보단, 그대로 놓아도 자연스레 흘러 넘칠 때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정말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흘러나오는 나의 살라이바.
그렇다. 사실 너무 배가 고파서 어디 여행지를 가보자라는 말도 하기 전에 동네 스테이크 집을 왔다.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었고, 이것이 행복이었다. 눈앞에 꽃처럼 펼쳐진 양파튀김은 행복의 수치를 한층 더 끌어올려주었다. 그리고 아내가 마시고 있는 버드라이트.
캬.
식사를 하고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어디 여행지를 가기에도 시간이 애매하다. 동네 산책을 하며 근처 몰에 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하다, 아내와 커플 운동화까지 맞추고 나니 벌써 밤이다. 카카오택시를 불러 호텔로 향하는 길, ABC마트에 들러 내가 제일 좋아하는 Modelo 맥주를 사서 호텔방에 누워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생각해 보면 괌에서 한 게 아무것도 없다.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는 스테이크를 먹었으며,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운동화를 구매하였고, 한국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내 사랑 모델로 맥주를 샀다.
그럼에도 좋았던 것은,
괌에서 시간을 보내며 한 달 뒤에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1년 뒤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생각과 계획들을 갖고 살아갈지 이야기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계획하고 이야기하는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 좋았다.
나는 첫 직장을 좋은 곳에서 시작을 하였다. 기본적으로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회사이며, 내가 경력직으로 도전할 수 있는 발걸음을 내딛게 해 주었던 항공사이다. 현재 나는 중동의 어느 외항사에서 보잉 787이라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고, 내 기준에서 직업적으로 한 단계 성장한 기분을 느낀다. 이직한 항공사와 내가 다녔던 항공사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기준에서 생각하였을 때 그렇다.
아내는 이미 국내에서 가장 큰 항공사에서 근무를 하였고,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위해, 그리고 외국으로 이직하는 남편을 위해 용기를 내어 퇴사를 하였다.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미래들이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을 하게 되었고, 하고 싶은 것들을 큰 제약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의 꿈을 위해 성장했음을 느끼고 그러한 도약에 있어서 부부간의 응원에 갈등이 없다.
그렇기에,
평소처럼 지내다 온 괌이었지만,
평소 같지 않은 우리의 대화와 상황으로 인해 너무 행복했던 레이오버가 되었다.
승무원을 그만둔 아내라는 제목에 걸맞게, 아내의 마지막 비행에 초점을 맞추어 쓸까, 아니면 어느 정도 나의 직장을 맞춰주기 위해 아내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고마움에 대해 표현을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매거진의 성격에 맞게 우리의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아내와 내가 꾸는 꿈이 이루어졌을 때는 어떤 제목의 매거진이 나올지 기대가 된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남은 미래의 이야기.
그 과정을 채워가는 우리의 시간 또한 행복하기를.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들의 시간 또한 그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