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세의 피오나는 가정법원 판사인데 냉철하고 이성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많은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자기 일에 열정을 가지고 일한다.
수많은 가사 재판을 다루고 판결을 내리는 그녀이지만, 막상 자신의 가정생활은 안정적이지 않고 불안해 보인다. 일에 너무 몰두해서 남편과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지, 남편과의 애정 전선에 문제가 있어서 일에 더 집중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남편은 피오나와 대화하기를 원하지만 그녀는 바쁘다며 그의 말에 응하지 않는다. 소통을 거부한 피오나의 태도에 좌절한 남편은 급기야 공개적으로 외도하겠다며 일종의 최후통첩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말에 어이없어하면서 냉랭하기만 했다. 결혼 생활에서 부부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현재 생활방식에 상관없이 남편이 늘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피오나에게 결혼 생활의 위기가 온 무렵, 그녀는 중요한 재판을 맡게 된다. 치료 목적의 수혈조차도 금지하는 여호와의 증인 가족문제였다. 애덤이라는 소년이 백혈병에 걸렸는데 본인의 확고한 종교적 신념으로 수혈을 거부한 상태여서 소년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재판 결정을 신청한 건이었다.
The Children Act는 1989년 영국에서 제정한 '아동법'인데, 법정이 미성년자(아동)와 관련한 사건을 판결할 때 최우선적으로 '아동의 복지'를 고려해야 함을 명시한 법이다.
피오나는 ‘아동법’에 근거해서 판결을 내리면 되지만, 소년의 의사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서 병원을 방문한다. 소년의 뜻은 완강했지만, 피오나와의 대화에서 그는 좀 흔들리게 된다. 소년이 기타를 연주하는데 ‘샐리 가든’이라는 아이랜드 민요를 연주했다. 피오나는 예이츠가 쓴 가사를 붙인 노래를 불렀다. 그 가사는 소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재판 판결로 애덤은 수혈을 받고서 생명을 건졌다. 소년은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나면서 정신적으로는 새로운 삶을 접하게 되었다. 자신의 부모가 종교적 신념으로 외아들인 자신을 왜 죽게 내버려 두려고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덤은 피오나가 자기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주었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자기의 인생을 의탁하고 싶어 했다. 애덤은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피오나를 따라다녔다.
피오나는 하나의 재판 건으로 해결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애덤이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당황하면서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피오나에게 거부당한 애덤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고, 백혈병에 다시 걸렸을 때 또 수혈을 거부했다. 이제 애덤은 만 18세가 되어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의사로 수혈을 거부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수혈을 거부했을 때는, 부모의 종교관으로 세뇌된 자기 결정이었다. 두 번째 수혈거부는 나름대로의 자기의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진정한 자신의 선택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자기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아노미 상태였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신봉했던 종교적 신념은 무너져버렸고, 확고한 삶의 방향성과 정체성은 아직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18세의 나이에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의 선택은 자유의지를 가장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을 한 ‘자살’처럼 보였다.
피오나가 소년과 좀 더 적극적으로 소통했더라면 소년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피오나는 소년의 죽음에 몹시 괴로워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타인이 계속 개입해서 책임지는 해결사 노릇을 어떻게 해줄 수 있겠는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어떤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법적인 것이든 말이다. 종교와 법. 두 세계의 가치관은 서로 다르다. 어느 편이 더 확실하고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자기가 서있는 세계가 옳다고 믿을 뿐. 우리는 옳다고 믿는 것에 자신의 정체성을 새기며 살아간다. 자기 정체성은 평생을 살아가며 추구하는 것이다.
60을 바라보는 노년기에 접어든 피오나는, 애덤을 만나면서 자기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스스로에게 깊이 회의했다. 그녀 역시 익숙하고 확실하다고 믿었던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접어들며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애덤의 삶과 피오나의 삶은 다른 듯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병치해서 볼 수 있다. 견고한 것이라고 믿었던 자기 확신, 즉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길을 잃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삶을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애덤의 죽음을 겪으며 피오나는 감정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 줄 거냐고 물었고, 남편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는 남편과 진정한 소통을 하면서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그녀 곁에는 끝까지 그녀를 사랑해 주고 지지해 준 남편이 있었다. 삶의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곁에서 손 잡아주는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누구나 삶에서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며 방황하게 되는 시기가 있다. 지금 그런 상황에 있지는 않아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진짜 나는 누구일까?’하고.
이 영화는 정체성, 소통, 가치관의 충돌 등 여러 면에서 생각하게 하는 주제들이 많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면 더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