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이름의 흔적들
간직하지 못한 유품
권광웅
대학에 입학했을 때, 어머니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셨다. 장롱 깊숙이 숨겨두었던 보따리 하나를 꺼내어 펼치셨다. 몇 겹의 보자기를 풀자, 낡은 시계와 카메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리엔트는 당시 시계의 대명사였다. 입학이나 졸업 선물로 최고의 인기였다. 카메라를 가진 집은 손에 꼽혔다. 기념사진 한 장 남기려면 사진관을 찾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시계와 카메라가 내 입학 선물이라고 하셨다. 내 기억 속에 없는 빛바랜 물건이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품이라 했다. 자세히 보니 롤렉스 시계와 망원렌즈가 달린 캐논 카메라였다.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흔치 않은 명품이었다.
가을이 왔다. 회사원인 고등학교 동창이 술 한 잔을 산다며 나를 포함한 대학생 친구 세 명을 불렀다. 서면시장 허름한 음식점에서 회포를 풀었다. 자리 파할 즈음, 술값을 낼 이가 없었다. 술 산다던 친구는 인사불성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주머니를 뒤졌지만, 돈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용돈으로 연명하는 학생이었다. 난감한 상황이 왔다. 주인아저씨의 눈빛은 내 손목을 향했다. "시계를 맡겨." 나는 소주 딱 한 잔에, 저녁거리 삼아 안주 몇 점 먹었을 뿐이었다. 친구들은 똑같이 나누어 줄 테니 시계를 맡기자고 했다. 친구들의 눈에는 유품이 아닌 돈으로만 보였기에 사수할 명분이 없었다. 술도 못 마시는 내가 '이 자리에 괜히 왔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친구를 믿기로 했다.
시계를 맡기고, 일주일 안에 찾겠다고 약속했다. 한 달이 지나도 친구들에게 연락은 없었다. 시계가 안 보이니 어머니는 물으셨다. 불편한 마음으로 이실직고했다. 어머니는 시계를 찾지 못한 나를 나무라지 않으셨다. 돈을 쥐여주시며, 아버지 유품이니 꼭 찾아오라 하셨다.
찾아갔지만, 시계는 이미 팔려 나간 뒤였다. 약속한 날 오지 않아, 안 올 줄 알고 넘겼다고 했다.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사회의 냉정함이 내 실수와 함께 무너지는 심정으로 가슴속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 새겨졌다. 약속한 기일에 찾아가 한 번 더 사정하고 기일을 연장했어야 했다. 아마도 명품이라서 아예 줄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친구들과의 인연도 끊었다.
술자리나 주최가 불분명한 모임에는 가급적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할 때는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 때만 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종종 술자리에 남겨지는 이들을 지켜야 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왜 그리 자주 일어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술 한 방울 못 마시는 내가 늘 해결사 노릇을 했다.
대학 시절, 성당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지리산 3박 4일 산행을 다녀왔다. 이를 계기로 커플도 생기고 자주 모임을 가졌다. 모임마다 내 캐논 카메라는 빠지지 않았다. 모일 때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내 카메라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
2학년 여름날, 발에 치일 정도로 인파가 넘치는 부산 송도 해수욕장을 찾았다. 우리는 장총 사격으로 인형을 넘어뜨려 가져가는 놀이에 빠졌다. 연인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남자의 자존심까지 걸렸다. 장총 사격놀이에 빠진 친구는 내 카메라를 놀이대에 놓아두었다. 인형은 아무도 얻지 못했다.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카메라를 지녔던 친구가 비명에 가까운 다급한 소리를 질렀다. “어! 카메라 어디 갔지?” 발도 없는 카메라가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카메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뇌리를 거치지 않은 깊은 내면의 신음이 소리 없이 온몸을 강타했다. ‘아! 아버지 유품인데...’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고, 가슴은 주저앉았다. 어머니께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변명거리를 찾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즘 한류드라마를 시청한 미국인은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 못 한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카페에서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다 잠시 자리를 비워도 노트북은 그대로 있다. 실제로 한국을 여행할 때도 그런 현상을 목격한다며 엄지척을 내보인다. 미국에서는 화장실 갔다 오면 노트북이 사라진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생활 수준도 높아졌다. 세상은 더 안전해졌다. CCTV와 치안이 일상을 지키는 세계 수준급이다.
지금이라면, 아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소유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아니었다. 소매치기나 절도가 성행하였다. 고가품은 생활비를 대신할 먹잇감이었다.
아버지는 힘든 시절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매일 새벽, 어둠이 채 걷히기 전 일터로 향하셨다. 거친 삶의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전사처럼, 아버지는 꿈꾸던 미래를 마음속에 그리며 희망의 불꽃을 지피셨다. 끈질긴 하루하루는 결국 결실을 맺었다. 남의 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땀으로 이룬 승리였다.
아버지의 삶은 부를 쌓기 위한 길이 아니었다. 사랑을 지키고, 희망을 키워가는 여정이었다. 가족을 품어 안고, 우리의 내일을 함께 걸어가려 애쓰셨던 아버지. 병마가 몸을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은 오직 가족을 향해 있었다. 손에 든 일거리를 내려놓는 법 없이, 삶의 끝까지 묵묵히 사랑을 이어가셨다.
서른여덟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눈빛은 변함없었다. 사랑과 희망, 지켜내려 했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깊은 눈 속에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 마음속 가장 단단한 자리에, 여전히 따뜻한 숨결로 살아 계신 분이다.
잃어버린 유품은, 어쩌면 내가 소중함을 모른 채 흘려보낸 나의 미숙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로서도 쉽게 마련할 수 없는 값진 물건이다. 나에게는 아버지의 찬란하고 위대한 유품이었음은 틀림없다. 간직하지 못한 유품은 세월 속에 사라졌지만, 아버지의 불꽃같은 삶은 내 안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봉인하지 못한 씁쓸한 기억과 함께, 그리움 또한 조용히 내 가슴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