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공탄, 가슴에 피운 불씨

사랑이라는 이름의 흔적들

by 가슴속호수

“그건 단지 연탄이 아니었어. 우리는 불덩이를 바라보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웃으며 힘든 시절을 견뎌냈단다.”

어느 겨울,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 불빛은 단순히 방을 데우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 불길은 말보다 더 깊은 사랑의 언어였다. 어머니의 주름진 손끝으로 눈가의 이슬을 닦아내실 때, 까만 재처럼 깊게 묻어 있던 기억이 따스한 불씨처럼 솟아올랐다.

그 시절, 구공탄은 우리 가족의 역사였다. 서로의 체온으로 하루하루를 지탱했던 날들. 검은 숯덩이 하나로 온 집안이 따뜻해지고, 다섯 남매의 삶이 데워졌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피어오르던 연기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족의 온기가 스며 있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새벽, 부엌에서는 늘 낮은 숨소리가 먼저 깨어났다. 뜨거운 불덩이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던 두툼한 손. 아버지의 손엔 매일 무언가를 지켜내려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불씨를 살펴보던 뒷모습은 세월을 등에 업고 있었지만, 불빛에 비친 옆얼굴엔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잔잔히 피어났다.

어린 시절, 그 존재는 늘 묵직하고 단단했다. 제 몸을 태워 열기를 내주는 검은 덩어리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청춘을 바치던 아버지 모습이 서로 닮아 있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손수레를 끌던 어깨에는 우리 가족의 미래가 실려 있었다. 어떤 비바람에도 그 불씨만은 꺼뜨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굵은 땀방울 속에 담겨 있었다.

1960년대 초, 눈보라 속에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날의 기억은 어머니의 눈시울을 붉히셨다.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온 동네 떠나갈 듯 울음을 터뜨렸고, 눈보라는 사정없이 몰아쳤다. 손수레 바퀴는 깊은 눈 속에 파묻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얼어붙은 손과 발, 깊어지는 절망 속에서 희망은 점점 멀어져 갔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둠 속에서 들려온 한 남자의 목소리는 동장군의 추위를 녹이는 따스한 봄바람 같았다. 연탄을 주문한 집주인은 묵묵히 삽질하며 길을 터주었다. 눈보라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의 따뜻함이 있음을 배우신 것이다. 한순간의 온정은 부모님 마음속에 영원한 불씨로 남았다. 이후로도 수많은 눈길과 빗길을 헤쳐 나갔지만, 그날의 기억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우리 가족의 등불이 되었다.

어머니가 연탄에 손을 대는 것을 극구 말리던 모습이 있었다. 무겁고 거친 연탄을 나르는 일,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 모두 아버지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손수레를 뒤에서 밀어주실 뿐, 무거운 덩어리에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어머니의 손은 평생 분결같이 희고 고왔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배려 속에는 깊은 사랑의 언어가 스며 있었다. 사랑은 화려한 수식어나 달콤한 말이 아닌, 투박하고 그을린 손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하는 모습은 어린 내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헌신이었다.

겨울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던 날이면, 아궁이에서는 언제나 무언가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구수한 곰국 냄새가 온 집안을 채우던 날, 어머니는 우리 다섯 남매의 숟가락에 고기를 듬뿍 얹어주셨다. 뜨끈한 국물 한 그릇은 추위와 배고픔을 한꺼번에 달래주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이런 날엔 뜨거운 국물이 최고지.” 어머니의 말 속에 담긴 소박한 행복은 지금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주말 저녁이면 낚시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아궁이 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에게 납을 녹여 봉돌을 만드는 요술을 보여주곤 했다. 불빛에 비친 얼굴은 평소보다 더 부드러웠고, 우리는 그 모습을 신비롭게 바라보았다. 연탄불을 통해 삶의 지혜를 전해주던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내 가슴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연탄은 고마운 존재였지만, 때로는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사촌 형과 함께 잠들었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방 안에 연탄가스가 서서히 퍼졌고, 우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에 우리를 발견한 다급한 손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일 이후 더욱 세심하게 아궁이를 살폈고, 나는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생명의 위태로움과 소중함을 동시에 가르쳐준 연탄은 우리 가족의 역사 속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세월이 흘러 구공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온기만은 여전히 내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다. 겨울바람이 불어올 때면 문득 아궁이의 불씨가 떠오른다. 작은 불씨 속에는 가족의 사랑, 희생, 그리고 인내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지금은 편리한 보일러가 집안을 데우지만, 그 어떤 현대식 난방도 연탄불이 주던 특별한 온기를 대신할 수 없다. 연탄은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역사였고, 서로를 향한 사랑의 증표였다. 검은 연탄이 하얀 재로 변하듯, 아버지의 고된 삶은 우리에게 따스한 미래로 피어났다.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온기를 전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려받은 사랑의 불씨를 이어받아, 세상의 차가운 곳곳에 따스함을 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가슴속에 영원히 타오르는 구공탄의 진정한 유산일 것이다. 검은 연탄재 속에서도 꺼지지 않던 붉은 불씨처럼, 아버지의 사랑은 내 삶의 어둠 속에서도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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