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수직의 절벽이 있었다. 그 뒤로 멀고 희미하게 둥근 산이 보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옷이 젖었지만 비 피할 곳을 찾지 않았다. 바다를 보고 있는 소녀가 있는 빨간 등대에서 나도 바다를 보았다. 오목한 자국을내며 비가 바다를 적시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짙은 물 냄새가 났다. 검은 돌 틈에 핀 유채가 흐릿한 허공에서 노란 꽃을 나풀댔다. 나는 오랫동안 참았던 숨을 토하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좋다."
포구에는 비 소리만 들렸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길이 멀어서였다.작은 공터가 있는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하고 그곳과 멀어질수록 마음에 담긴 어딘가를 떠난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등대와, 바다와, 작은 마을. 그 마을로 접어드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차창 밖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곳에 있던 내가 그리웠다.다음에온다면꼭 하루를 묵어야겠다고생각했다.
그다음 그곳에 갔을 때는 가을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 하늘과 맞닿은 언덕에는 갈대가날리고 있었다.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고개를 들어갈대를 보며 걸었다. 빨간 등대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냄새가 났다. 바삭한 공기 속을 지나온 짭짤한 가을바다냄새였다.바다는 구슬을 엮어 굴리듯 잔잔히 파도를 일으키며빛을 냈다.그빛 아래에는반짝이는 비늘이 덮인눈이 맑은 물고기가살고 있을 것 같았다. 그곳의 가을은 풍요롭고 멋졌다. 나는 두 개마음을 품은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언젠가 비를 맞으며 바다를 보던 나를조심스레찾았다. 내가 있었던곳은 아름답고쓸쓸했다. 그날도나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다음에는 하루를 묵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갔던 그곳에는 장미가피어 있었다. 장미는돌담의 검은빛과 섞여진지하게붉은빛을 내었다. 장미가 보일 때마다사진을 찍었다.훗날 사진 속 장미를 보면 모두 그게 그것인 것처럼 똑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매번 사진을 찍을 때마다 장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달랐다. 장미가시에 찔려 손가락 끝에 송글 거리던 피가 작은 떨림에 빨갛게 번지듯, 한송이 한송이에 담긴 장미의 붉은빛이 마음에 담겼다. 마을 끝에 도착하니바다가 보였다.바다가푸른색으로 보이다 붉은색으로 보이다 했다. 이상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서장미의 붉은빛이씻기지 않아서였다.그날도 나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다음에는 꼭 하루를 묵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그곳에 갔을 때는씁쓸했다. 성처럼 생긴 리조트와 낯선 식당이 어색하게 포구에자리 잡고 있었다. 허전했다. 허물없이 마음 나누던 친구를 잃어버린 것처럼.그러나푸른 바다와 병풍 같은 절벽, 멀리 보이는 둥근 산,다정히마주하고 있는 형제섬은 그대로였다.철 지난 장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피어있고 덩달아 유채도꽃을 피우고 있었다. 얼떨떨했다. 꽃들을 보다 잠시 계절을 잃어버릴 뻔했다.그러나그러면 좀 어떤가. 반갑고 애틋해 마음이 붉게아릴 만큼좋으면 된 거지.그날도 나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다음에 오면하루를 묵어야겠다고생각했다.
아쉬운 일들이 많다. 예전 같으면 버스라도 타고 잠시 콧바람을 씌고 왔을 텐데. 못된 바이러스 때문에 떠나는 것은 엄두도 못 내는 요즘. 이제는 정말 하루를 묵기 위해 그곳에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다. 고요한 포구와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 소녀가 있는 빨간 등대. 바다 위에오목한자국을 내는 비에 기꺼이 내 몸을 내줄 수 있는 곳. 그런 그곳에 마음 두는 이유를 말해보라 하면 장황하게 이야기하지만 정작 핵심은 없는. 그런데도 그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하긴 누군가를 무언가를 좋아하고 만나기를 바라는데 이유가 있을까. 볼 수 없으면 그리워하면 되는 것이고,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볼 수 있는 날이 있겠지.
그래서 소망해보는데. 어느 날 기별 없이 그곳에 갔을 때 문을 열면 고요한 포구와 빨간 등대와 바다가 보이는 작은 방이 있었으면 좋겠네. 꾹꾹 참아왔던 한숨을휴~하고뱉어내며,그 방에 툭~하고 짐을 풀고 하루를 묵었으면 좋겠네. 파도소리와 바람소리와 빗소리가 들리는 방이 있는 집 검은 돌담에붉은 장미가 피어있는. 그곳이 대평리 몇 번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 가는 날까지 모든 것이 온전히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