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해서 찬란한 가을에
<단풍>
어릴 때 부르던 노래처럼
빨갛게 노랗게 물드는 줄 알았다
나뭇잎이 예쁜 옷 입고
치장하는 줄 알았다
실상 단풍은
물빠짐
많은 햇빛 받을수록
더 빨리 초록을 내어주는
빛바램
긴 겨울 지루하고 고단할테니
짙은 초록의 무게를 떨쳐내고
급기야 스스로 떨어져나가
가지의 짐 덜어주려는
평범한 희생
딸의 자식들이
두 발로 걷기까지 다 키우고서도
혹시나 짐이 될까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까지
조심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몇 년 전, 교사 회지에 냈던 시이다. 엄마를 생각하며 쓴 시라, 엄마에게 드렸다. 엄마는 너무 좋아하시며 읽고 또 읽으셨다. 외우고 싶어서 아예 멜로디를 넣어서 노래를 만들어 녹음하며 들으셨다.
어릴 때는 한없이 엄마를 좋아했고, 어떻게든 성공해서 아빠 없이 우리를 키우시는 엄마에게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서 돈 벌었으면 좋겠다던 엄마에게 보란 듯이 대학에 합격해 보이리라 생각했다. 독기로 공부하고, 스스로 대학을 알아보며 원서를 냈고, 혼자 고속버스를 4시간 타고 서울에 면접을 보러 다녔다.
합격은 했지만, 돈이 없었다. 학생 때부터 용돈기입장 써가며 악착같이 모은 돈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 100만 원이나 됐는데, 그게 내가 쓸 수 있는 돈의 최대치였다.
지금 생각하면 서울에 있는, 그 좋은 대학에 붙었으니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데
엄마는 돈이 없어서 곤란했겠다 싶다.
돈이 없다고 대학을 포기할 순 없지. 나는 서울로 가야 해. 넓은 세상으로 가서, 꼭 성공할 거야.
대학교 학비, 기숙사비, 하숙비 모두 내가 마련해야 한다고, 엄마를 힘들게 해서는 안된다고 아등바등 살았다.
대학생 때 서울에 와서 느낀 당황스럽던 빈부격차, 막막했던 하루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한테 왜 그렇게 돈 얘기를 하기 어렵던지.
'아빠 없이 나를 이만큼 키워주셨는데 어떻게 여기서 더 돈을 달라고 할까'라는 죄스러움,
'어차피 없을 거라서'라는 체념,
'미국 애들은 20살이면 다 독립한대. 나도 그래야지!'라는 자기 위안.
장학금을 안정적으로 받고 학교를 다닐 만큼 성적이 좋지도 못했기 때문에 더 궁핍한 나날이었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버거웠던 대학시절을 보내고, 바라던 가정을 꾸렸다.
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엄마가 서울로 올라오셔서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함께 살며 키워주셨다. 엄마는 2년 터울로 태어난 나의 둘째, 셋째까지도 너무나 큰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그 기간이 없었다면 나는 아이 셋을 낳지도, 직장 생활을 지속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20대에 교사가 되고 나서 3년간, 매달 월급의 절반 정도를 엄마께 드렸다. 그 돈을 보태 엄마는 집을 사셨고(아, 그때 고향이 아닌 서울에 집을 사셨더라면!ㅎㅎ) 그때 내가 아이를 낳으면 꼭 키워주리라 다짐하셨다고 한다. 마음속으로 하신 약속을 지키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20살 때부터 버티고 애써서 독립을 했는데 갑자기 아이를 출산했다는 이유로 친정엄마와 같이 사는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변수도 많았다. 어릴 때의 마음과 다르게, 어른이 되어 엄마와 살면서는 서운함과 부담감을 느낄 때가 정말 많았고, 엄마를 향한 양가감정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더 힘들었다. 엄마에게 힘든 모습 한 번 보이지 않고 자라온 내가, 뒤늦게 겪는 관계의 혼란기였다.
차라리 조금 더 늦게 독립을 할걸. 고등학생 때까지라도, 아니 대학생 때까지라도, 엄마에게 더 많이 떼쓰고, 요청하고, 맡겨놓은 것 있는 사람처럼 내놓으라고 할걸.
이제는 엄마와 다시 관계를 정립하고 있다.
초등학생 때의 일기를 읽으며 생긴 질문을, 엄마와 한 번씩 데이트를 할 때 넌지시 던져본다.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우리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일하러 가셨잖아요. 무슨 일 하셨던 거예요?
그럼 나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중학교 1학년 때 그 일은 왜 그렇게 된 거였어요?
엄마가 어떤 일은 내가 5학년 때가 아니라고 우겼다.
아니에요. 분명히 5학년 10월부터 6학년 1월까지예요. 내 일기장에 다 나와있어요.
서로의 기억의 조각과 기록을 맞추어 역사를 되짚어본다.
다시 어렸을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어른스럽게 자랐을 나지만, 엄마가 되어 나의 엄마의 과거를 보니, 많은 부분 이해가 된다.
우리 엄마 참 대단하다,
엄마 진짜 열심히 살았네,
엄마는 자식에 대한 책임감이 엄청 강했구나, 아니 그 책임감 때문에 살 수 있었구나.
지난봄에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와 동대문에 갔는데, 엄마가 4만 원을 꺼내시더니 우리 아이들에게 만원 씩 용돈을 주고, 마지막으로 나에게도 만 원을 주셨다. 나는 너무 놀라고, 좋아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순식간에 3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용돈을 받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죄송스러움 없이, 순수하게 받는 용돈. 어린아이에게 만 원이면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많았던 시절이기에 그 시절의 설렘과 환호가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다 큰 어른이 엄마한테 만 원 받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용돈 주시는 것도, 밥 사주는 것도 너무 좋다.
엄마한테 더 많이 받고 싶다.
엄마가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