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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소묘 Dec 13. 2022

시간을 저장하는 방법

 '세월'_아니 에르노_1984북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작품 ‘세월(Les Ann︠es)’의 첫 번째 문장)

오늘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토요일 아침, 37층에 위치한 아파트 커뮤니티 실에 우리는 모였다. 안개에 둘러싸인 도시 풍경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안개 덕분에 주변 풍경들이 시야에서 모두 삭제된 상태다. 모인 사람들은 하나, 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대표작 ‘세월(Les Ann︠es)’을 함께 읽는다. 아니 에르노는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며 독특하게도 자신이 경험한 것만 쓰는 작가라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만 쓴다고 하니 책은 장르 상 소설이라고 되어 있어도 에세이 느낌을 풍긴다. 그야말로 그가 지냈던 ‘세월’을 소설로 쓴 것이다. 성장의 시기마다 모티브가 되는 한 장의 사진이 있었고 그 사진과 함께 이야기는 시간순으로 전개된다. 소녀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학교에 다니고 그와 동시에 세상 어느 곳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 TV 광고에서 보이는 삶과 현실을 비교하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차이를 생각한다.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져 소녀는 바칼로레아를 마치지만 삶은 끊임없는 안개 속에 끝없이 펼쳐진 힘겹게 올라가야 할 계단임을 알게 된다. 사랑도 결혼도 타인의 판단과 시선 아래에서 전개되지만 그럼에도 시몬 드 보부아르를 꿈꾸며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질문을 찾아 나선다. 작가는 경험을 기초로 여자들의 역사와 인생 그리고 기억 속에 숨어 있는 과거를 담담하게 써 내려간다. 자신이 겪은 사건과 생각 그리고 그 시대를 관통하는 세태의 기록, 한 사람의 삶과 그 시절을 볼 수 있는 책이다.

한 개인의 삶에 역사는 의미가 없었다.
우리는 그날그날 그저 행복하거나 불행했다.P.116


격동기를 살아간 데에 비해 무미건조한 문장이다. 글에는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미사여구가 거의 없다. 크게 드러나지 않는 감정과 함께 짧은 문장 그리고 단어의 나열이 전체를 이루며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는 듯이 쓴다. 읽기가 어려웠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작가의 덤덤하게 나열하며 내놓은 단어들 때문이리라. ‘세월’ 속의 명사들을 읽고 있다 보면 그녀의 단어 배열에 하나 덧붙이고 싶은 나의 단어가 자꾸만 생겨난다. 두려움, 몸짓, 장면, 대화, 날카로운 감정. 그렇게 나의 경험과 기억을 끌어올린다. 작가의 독백 속에서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안개로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토요일 아침, 깜깜한 수증기 속에 호기롭게 발을 들여놓은 나. 가늠하기 힘든 안개 속을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안개는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대감을 주었다. 어떤 시간을 기대하기에 이토록 지독한 안개를 헤쳐 나가려는 걸까. 자신을 향한 질문이 시작되고 큰 숨을 내쉬어 본다. 날 선 질문들을 한 움큼 쥔 채 달리고 달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는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세월_아니에르노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마 책 한 권이 저절로 써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P178


 지나온 세월 속에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천천히 한 발자국씩이라도 더듬어 나가야 하나라도 보인다는 것을. 하나가 보이고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또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어느 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아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지난 세월을 후회도 해본다.

 가슴이 아려온다. 그래도 초연히 마음을 다독이며 조금씩 걸어 본다. 걷다가 또 걷고, 멈춰 섰다가 걷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세월은 지나간다.

우리의 세월이 흘러간다.

세월이 지난 후에도 지금 느끼는 감정의 형태를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기록한다.


 기록해 나가면
 ‘모든 장면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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