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리움과 아픔을 지우는 시간

에세이 소설 - 엄마 없는 밤

by 온벼리
모든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고 소설의 모양새를 한 에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에세이 소설이라는 명칭은 없기에 정식 명칭은 소설입니다.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영식은 죽기 한 달 전 순자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내가 걱정 헐까 비. 말을 안 혔는디... 아무래두 말혀야 헐 거 같어서..." "뭔디 그려?"

"지난번이 어항 철공소 들렀다 온다구 갔었잖여... 그때 나 죽을 뻔 혔어!"

"뭔 소리여?"

"철공소에 갔는디. 나한티 닻 옮기는 줄 즘 잡어 달라구 허길래. 내가 잡어줄라구 혔지! 근디 그 옆이 있던 사람이 얼릉 가가꾸 잡드라구. 그려서 나는 뭐 그냥 옆이서 구경만 혔지!"

"그려서?"

"그 큰 배들이 쓰는 무거운 닻 있잖여! 1톤짜리 말여. 그걸 체인이 걸어서 들어 올리구 있었는디! 근디 보통 무게가 아닝깨! 체인이 끊어져 버리드라니깨!"

"이~ 그려서?"

"체인이 끊어졌응깨 닻이 떨어졌을 거 아녀?"

"이이~"

"어휴~~ 그거 붙잡구 있던 남자가... 목이... 어휴~ 잘러진겨!"

"이?? 목이?? 얼라~"

"재수두 드렇게 읎지! 워떻게 목이 잘러진다나! 어휴~ 그 큰 닻이 사람 머리 위루 떨어징깨 목이 댕강~허구 잘렸는디 그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서 내 앞이까지 오드라니 깨!!

어이구~ 내가 그거 보구 속이 뒤집어져 가꾸! 막 토했잖여~"

영식은 눈에 힘을 주며 더욱 심각하게 말했다.

"봐봐 이? 나를 불렀는디! 내 대신 그 남자가 갔잖여? 긍깨 내 대신 그렇게 된 거 아녀!

그렁깨 내가 죽을 뻔 혔다구 허는겨!"

"큰일 날 뻔혔네! 어이구~ 그 남자두 참! 어이구~"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자에게 영식은 또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디... 내가 진짜 죽으라는 가벼!!"

"이?? 또 뭔 소리여?"

"내가 또 죽는 꿈을 두 번이나 꿨는디 아~ 예사 꿈이 아닌 거 같어!"





영식의 첫 번째 꿈은 방에서 죽어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꿈이었다. 꿈을 짧았고 꺼림칙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금세 잊었다.

며칠 뒤 두 번째 꿈을 꾸었다.

어머니 아버지 산소 앞 빈자리에 자신이 이미 죽어 묻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몸은 무덤 속에 있었지만, 영식은 무덤 위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고 멀리서 찰방거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새소리, 벌레 소리만 들려왔다. 마을이 멀지 않은데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니 영식은 오랫동안 외로이 앉아 있었다.


버스럭버스럭 풀 밟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순자가 옆으로 와 영식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순자가 너무도 반가워 일어나 와락 껴안았다. 영식은 순자를 이리저리 살폈다. 많이 늙어 있었다.

반가웠지만 순자가 죽어서 왔다는 것을 깨달은 영식은 아이들이 생각났다.

"워쩌케 왔댜? 애들은 워쩌구 온겨?"

순자는 미소를 띤 얼굴로 영식을 바라봤다.

"다 키워 놓구 왔응깨 걱정 말어! 이제 지들이 다 알어서 잘혀!"

"그려~ 어이구 우리 마누라~ 사느라 고생혔네!!"

영식은 순자를 꼭 안아주었다.


꿈에서 깨어난 영식은 자신이 죽는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며칠 전 꿈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목이 잘려 죽을 뻔했던 일과 두 번의 죽는 꿈을 생각해 보니 어쩌면 자신이 곧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영식의 꿈 이야기를 들은 순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죽기는 왜 죽는댜? 생때같은 새끼들이 넷이나 있는디!! 당신 죽으믄 새끼들은 나 혼자 워쩌라구 그려?"

순자는 영식의 말이 불편했다. 그간 참아온 세월이 억울해 쏘아붙이며 말했다.

"어이구~ 그렁깨! 맨날 술이나 처먹지 말구~ 정신 즘 차리구 살어!!

뭐 헐라구 애들은 넷이나 나가꾸. 살기두 힘들어 죽겄구먼!

당신이 죽기 전이 내가 먼저 죽겄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열심히 살 생각이나 혀!!"

영식의 말을 마음에 담고 싶지 않았던 순자는 애써 외면했다.


영식은 살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렸다. 허망하게 먼저 죽은 가족들을 마음에 담고 고통을 견디기도 벅찬 세월이었다. 죽음은 항상 영식의 주변에 있었지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했다. 죽고 사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지, 젊은 나이에 벌써 죽음이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영식은 살아온 흔적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술주정으로 보낸 세월이 부끄러웠고, 자신의 무시와 구박으로 기를 펴지 못하는 큰 아이에게 미안했다. 순자와 아이들에게도 권위만 내세운 것 같았다. 아들 낳겠다고 자식을 넷이나 낳아 놨으니 내가 죽으면 순자와 아이들은 어떻게 사나 생각하니 먹먹해졌다.




은주는 영식의 전화를 받고 버스를 타고 어항으로 내려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영식은 은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판장 옆으로 길게 늘어선 횟집 골목을 지나 구석진 곳에 있는 다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방이 막혀 답답하고 어두운 실내에 주황색 소파들이 빼곡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방에 들어선 영식은 마담과 꽤 친한 듯 인사를 했다. 은주는 영식이 마담과 친하다는 것에 기분이 나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영식은 메뉴판도 보지 않고 따듯한 쌍화차 한잔과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붉은색 립스틱을 진하게 바르고 껌을 딱딱 소리 내며 씹던 마담은 은주를 보며 영식에게 물었다.

"딸이야?"

"이이~ 둘째 딸이여! 인사혀야 지!"

"안녕하세요."

은주는 몸을 반만 일으켜 대충 인사를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주 앉은 영식은 무슨 작정이라도 한 듯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학교는 댕길 만 허냐?"

"응."

"집이서 학교가 먼디 워쩌케 다니냐?"

"버스 타고 다니지."

"버스는 자주 오냐?"

"아니! 20분에 한 대씩밖에 안 와."

"버스는 타구 댕길 만 혀?"

"아니! 맨날 버스가 터질 것 같애!!

애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타니까 아저씨가 애들을 뒷문으로 태워주는데 표는 내릴 때 받구.

애들이 뒷문에 막 매달려 있거든! 그러면 아저씨가 앞문으로 내려서 매달려 있는 애들을 막 밀어 넣어!

그러면 막 깔려 죽을 거 같애! 맨날 낑겨서 다녀!

그래서 가끔은 친구들이랑 걸어서 내려올 때두 있어."

"어이구~ 하숙집은 워뗘? 친구 누구 집이여?"

"희선이."

"이... 그려 혜선이. 혜선이네 집이는 있을 만 혀?"

"희선이라구!"

"이~ 희선이! 희선이랑은 지낼 만 혀?"

"응... 희선이랑 친해. 희선이네 엄마랑 아빠도 잘해줘."

"그 집은 애가 몇이냐?"

"남동생이랑 희선이랑 둘이야."

"이...... 그 집 아빠는 뭐 헌다니?"

"공무원이래."

"이...... 너 공부는 잘 되니?"

"어?...... 그냥 그렇지 뭐."

공부가 잘되냐고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영식의 모든 질문도 그렇지만 언제부터 은주의 공부에 관심이 있었다고 묻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공부를 잘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은주는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냥 수업을 들을 뿐이다. 아빠는 그것도 모르는구나 싶어 더 이상 말하기 싫어졌다. 대답할 말이 없었던 은주는 주스를 들이키며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촌스러운 그림 액자만 쳐다봤다.

잘 지내냐고 물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곁에 있으면서 학교는 잘 다녀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병원에 다녀오면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잠을 자고 일어나면 밤새 잘 잤는지, 많이 아플 때면 얼마나 아픈지쯤은 물어보는 게 부모 자식 간의 일반적인 대화일 텐데 영식은 사소한 대화조차 없더니 오늘에서야 갑자기 질문을 쏟아내니 서로 어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영식은 일어나 카운터로 가 마담과 농담하며 어색함을 모면해 보려 했다.


주스를 빨대로 쪽쪽 소리 나도록 다 빨아먹어버린 은주는 주스컵에 보리차를 따라 빨대를 가지고 장난치며 가끔씩 영식을 쳐다봤다. 영식은 마담과의 대화가 더 편해 보였다. 한참을 마담과 떠들던 영식은 찻값을 계산하고 은주에게 가자며 손짓을 했다.


밖으로 나와 어시장을 지나 이른 저녁을 먹으러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국밥이 뜨거웠던 은주는 식혀가며 천천히 먹었다. 후루룩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영식은 멀뚱멀뚱 밖을 내다보다 때마침 식당으로 들어온 남자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국밥집에서 은주와 영식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대천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서 영식은 은주에게 삼만 원을 내밀었다.

"뭐야?"

"용돈이여."

"왜 케 많이 줘? 엄마가 일요일에 돈 줬는데!"

"그건 생활비 쓰구... 이거는 너 사 먹구 싶은 거 사 먹어."

"그냥 주는 거라고?"

은주는 돈을 받지 않고 '아빠가 왜 그러지?'하고 아주 잠깐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영식이 민망해지기 전에 얼른 돈을 받아 들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알았어.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에 씩 웃어 보이는 영식의 눈가에는 주름이 선명했다. 구불거리는 반곱슬 머리가 제법 길어 있었고, 흰머리도 많이 늘어 있었다. 정수리에 숱은 줄고 이마는 더 넓어지고 있었다.

'아빠는 대머리가 되려나? 할아버지도 대머리였나?'

은주는 조금씩 늙어가고 있는 영식의 모습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영식은 은경도 어항으로 불렀다. 생일이었던 은경에게는 오만 원을 주었다. 은경은 그날 영식이 무섭지 않았다. 말투는 유난히 부드러웠고 따뜻하기까지 했다. 기숙사로 돌아온 은경은 영식이 준 용돈으로 친구들에게 저녁을 샀고 생일 파티도 했다.


은주는 영식이 죽고 한참 뒤에야 영식이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어항으로 불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례 이후 영식은 은주의 꿈에 자주 나타났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와서는 그동안 연락 못 해서 미안했다며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은주는 돌아와 줘서 고맙고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영식을 안고 한참 울었다. 그러다 깨어나면 주체할 수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에 꿈의 여운이 남아 한참을 울었다.


어느 날 꿈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새 삶을 사는 것을 지켜보며 배신감에 눈물을 흘리다 깨어 나가기도 했다.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연락을 줬더라면... 염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 보고 인사할 시간을 줬더라면... 은주는 어쩌면 영식을 좀 더 빨리 보내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움과 아픔을 지우는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은주의 꿈속에서 영식은 팔 년을 살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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