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대혼돈의 카오스, 나의 출산 육아기(4)
임신 초기 때의 일이다.
이미 오래전 육아의 경험이 있는 일본인 친구가 놀러 왔었는데
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난 일부러 아줌마 친구는 사귀지 않을 건데?'라고 얘기했었다.(일단 내가 아줌마가 된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비록 살던 동네를 떠나와서 가까이 친구하나 없는 외딴곳에 살고 있지만.
친구들을 만나고 싶으면 지하철을 타고 언제든지 부천이나 서울에서 친구들과 언니, 동생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는 굳이 새로운 아줌마 친구를 사귀라는 조언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장거리 이동이 불가능 해졌고 집에만 있는 것이 답답하기도 해서 가까운 문화센터에 임산부 요가를 신청했을 때였다.
비슷하게 배가 부른 여자들이 같은 요상한 자세로 끙끙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재밌기도 하고 동질감도 느껴졌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첫 수업이 끝나고 나에게 말을 걸어온 산모가 있었는데, 그 후로 그 사람과 자연스럽게 첫 아줌마 친구가 되었다.
몇 번의 대화 후 우린 꽤 생각이 잘 통하고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것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우린 인터넷 카페에 태교를 위한 '임산부 영어 스터디 모임'이라는 모임까지 만들게 되었다.
10명 정도 모인 임산부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영어 공부도 하고 수다도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아줌마 친구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괜찮게 생각되었다.
오히려 아이가 없는 친구들이나 남편보다 더 임산부의 고충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묘한 동지애가 새록새록 피어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 동지애는 아기가 태어난 후에 더욱더 불타올랐다. 산모들은 출산일이 모두 제각각이었는데, 처음 출산한 산모부터 마지막에 출산한 산모까지 서로를 챙기고 출산기를 공유하며 출산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아기가 100일이 되었을 무렵에는 비슷한 시기의 아기 엄마들이 모여 공동육아를 시작하였다.
공동육아라 함은 5~6명의 엄마들이 어느 한 집에 모여 아침부터 신랑 퇴근시간까지 함께 애를 보는 것을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서(일어났다기보다는 잠을 거의 못 자기 때문에 '잠시 정신이 든다'라는 말이 맞을 듯하다)
적당히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한 후(엄청난 무게의 아기 짐가방을 챙긴 후) 한 아기 엄마의 집에 하나둘씩 모여든다. 이곳에서 엄마들은 전쟁터에서 잃어버렸던 전우를 만난 것처럼 서로를 격하게 반겨준다.
이렇게 모인 엄마들이 뭔가 재미있는 것을 하며 친목을 다지거나 차를 마시거나 제대로 된 대화를 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엄마들은 각자 기저귀를 갈고, 각자 젖을 먹이거나 각자 애를 재우러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심지어 밥도 같은 시간에 같은 식탁에서 먹을 수 없다. 그럼 각자 집에 있지. 왜 모여있느냐라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애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너무 서럽고 답답하고, 인간의 대화가 그리워서 무거운 기저귀 가방을 둘러메고 버스를 타고 택시를 잡아타고 모이는 것이다.
이런 공동육아가 없었다면, 이 시기에 내가 우울증 없이 애를 잘 키울 수 있었을까? 뉴스를 보면 가끔 산후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아기에게 몹쓸 짓을 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엄마들이 있는데 결코 남일 같지 않다.
멀쩡했던 나도 출산 육아 우울증이 극에 달했을 땐 그렇게 힘들었는데,
주변에 기댈 친구 하나, 가족 하나 없이 남편의 공감과 도움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
심지어 그 엄마의 정신이 일반인 보다 나약한 사람이었다면 '충분히 나쁜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관계가 더욱더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지금은 다들 흩어져서 몇몇 엄마들만 연락을 이어가고 있지만 아줌마이면서 아줌마를 거부했던 무지한 나의 과거를 반성하며 그때 그들이 있어서 그 시간들을 잘 견딜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