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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갑 Feb 01. 2022

지루함, 놀이, 창의성에서 스우파까지

지루함을 못참는 이들에게

나는 뭐든지 ‘효율’을 중요시하던 사람이었다. 시간대비 낭비인 것같은 일이라면 과감히 쳐내거나 어떻게하면 시간을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재미있었다. 어찌보면 게임같았다. 이게 나에게는 귀하디 귀한 ‘시간’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사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다. 나처럼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시간이 부족한 사람에게 2가지 선택밖에 없기 때문이다.


1. 하고 싶은 걸 줄이거나

2. 시간을 만들어내거나


나는 2번째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하고 싶은 걸 줄인다는 건 내 삶의 행복도를 크게 낮추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 부분이 토드 로즈의 <다크호스>에서 말하는 충족감​과도 연결이 되어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떻게하면 내가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시간관리가 중요하다는 걸 알았지만 시간관리는 나에게 삶을 옭아매는 듯한 답답함을 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오랫동안 했다.


그러다가 찾게 된 방법이

1. ‘새벽 시간’ 이용하기

https://brunch.co.kr/@onekite1025/1444

2. ‘습관’의 힘 이용하기

https://brunch.co.kr/@onekite1025/1235

3. 급할수록 당장 도움이 안되는 일을 하기 (급하지 않으면서 중요한 일)

였다.


3번째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최근에 읽은 앵거스 플레처의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를 통해 그 생각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었다. 우리는 왜 지금 당장은 도움이 안될 것 같은 일을 해야 할까? 실용서가 넘칠 만큼 많은데 왜 굳이 밥벌이에 도움도 안될 거 같은 문학을 읽어야 할까? 그것도 우리에게 ‘지금’말이다. 저자는 다양한 문학 작품과 발명품을 예로 들면서 지금의 우리에게 문학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나열한다. 여러 챕터 중 나는 특히나 관심이 있었던 18장의 ‘창의성을 길러라’가 마음에 훅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쓰지 않고 그저 읽기만 한다면 이 감정도 휘발될 것을 알기에 바로 이렇게 글로 남기게 되었다.


아이들에게서 놀이를 빼앗는다면?

곰돌이 푸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캐릭터말고 내용을 깊이 있게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것이라 생각한다. 곰돌이 푸는 항상 꿀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놀러다니며, 앨리스는 꿈 속에서 토끼를 쫓아가다가 이상한 나라로 빠지는 환상 속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걸 읽어도 우리 삶에 그다지 도움이 될 것같지는 않다는 게 다 큰 어른인 효율성을 중시하는 내가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 부분을 읽다가 생각난 책이 있었다. 바로 <아이들을 놀게 하라>라는 책이었다. 내가 파시 살베리와 윌리엄 도일의 <아이들을 놀게 하라>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놀이라는 권리를 빼앗긴 수많은 어른들이 생각이나서였다.


나는 일본 도쿄에서 7년을 살았었다. 9살 그러니까 초3 여름방학까지 다니다가 한국에 이사오게 되었는데 그 때의 충격이 지금도 가시질 않는다. 지금 일본은 유토리 세대네 뭐네하면서 공부를 많이 안시켰던 과거를 후회하곤 하지만(지금 어떤지는 현지 사회분위기를 알 수 없어서 정확히 말하지는 못하지만, 얼마전까지만해도 교육에 손놓은 세대라며 유토리 세대인 신입사원의 문제점들을 한탄하는 기사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게 정말 후회할 일일까하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나는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속셈학원에 보내졌고, 그 당시 국민 피아노학원붐이 인 것처럼 너도나도 피아노학원에 보내졌다. 학원에서 한글을 열심히 배우는 것과 동시에 나는 학교에서의 ‘0교시’의 존재에 깜짝 놀랐고, 그 0교시에 하는 것은 깍뚜기 공책에 한자 빽빽이를 쓰는 것이었다. 그 당시 연필을 잡고 빽빽이를 너무나도 많이 쓴 탓에 오른손 세번째 손가락은 푹 들어갔었고 그 부분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굳은 살로 박혀 있다는 점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나의 일본에서의 초딩생활을 돌아보자면,

- 학교에 거의 놀러(?) 간다.

- 그리고 1시~2시쯤에 하교하고 방과후 교실같은 ‘학동클럽’이라는 시립운영 무료 센터에 친구들과 룰루랄라 간다.

- 그리고 거기에서 저녁 6시쯤까지 또 놀다가 집으로 귀가한다.


이런 생활을 반복했었다. 학동클럽에서 아이들과 하던 놀이는

- 외발자전거 타기(선생님이 알려주는게 아니라 외발자전거가 여기저기 널부러져있다. 아이들은 그걸 타고 벽을 잡으며 스스로 타는 법을 익힐 뿐)

- 책이나 만화책 읽기

- 피구하며 놀기

- 수다떨며 놀기

- 그림그리며 놀기 등등


이게 다 실내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숙제같은건 해본 기억이없고, 방학 때 일기쓰기같은 숙제가 있어서 그걸 며칠만에 몰아서 했던 기억은 난다. 일본에서 학원이란, 집이 대체로 잘 사는 아이이거나 공부 이외의 것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주위 친구 중에는 극소수였고 2명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주판 학원, 체조 학원에 다니는 친구 딱 2명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노는 것에 진심이었던 일본 도쿄 생활을 뒤로하고, 오로지 공부! 학원! 효율!!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어린 시절을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름 적응력은 갑이었기에 그냥 그런갑다하며 지냈다. 그리고 이게 정말 이상하다는 것을 한참 뒤에 어른이 된 후 깨닫게 되었다.


과거엔 아이들이 ‘도깨비와 요정’에 관한 창의적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더 이상 아니다. 미래엔 (…) 아이들은 물리 법칙을 배우게 될 것이다. (…) 이런 합리적 교육 프로그램이 18세기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미국의 교사들 수백 명에게 채택되었다. (…) 로크 이전엔, 아동 교육은 자발적이고 즉흥적이어서 상상력을 발휘할 자유로운 공간과 시간이 많았다. 로크 이루론, 아동 교육은 점점 더 엄격해지고 형식적이고 진지해졌다. 아이들은 책상에 줄지어 앉아 계산과 문법에 관한 규칙을 암기했다. 노는 시간엔 규칙을 갖춘 조직적 게임과 스포츠를 해야한다고 배웠다. 학교 밖에서 보내는 시간에도 학습을 이어가도록 숙제를 할당받았다. (…) 그러한 시도는 모두 매우 합리적이었다. 아니, 합리적인 것처럼 보였다. 20세기 후반에 과학자들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상은 위협이나 결점이 아니었다. 시간을 낭비하는 방종도 아니었다. 공상은 정신 건강에 유익한 활동이었다. -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18장 중에서

오잉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같지 않은가. 우리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놀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어른들 자신들에게도 말이다. 사실 놀이를 하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하는 편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들 뭐가 좋은 놀이인지 모르고 스마트폰을 보며 수동적으로 무언가를 멍때리며 정보에 노출되는 것을 ‘휴식’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루함은 창의성을 가져온다

놀이에 대한 오해는 지루함을 견딜 수 없는 어른들이 만들어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도 지루함을 참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지루해하다가도 자신들의 방법으로 재미를 찾는다. 어른들이 아이 손에 스마트폰을 쥐어주기 전까지는.


우리의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뇌가 아무 일에도 관여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고, 뇌의 자유 시간을 이용해 뭔가 신비로운 활동을 수행한다. 아이들의 무질서한 정신 놀이는 그저 아이들을 가만히 놔둔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교육적 완구와 실용적 취미로 시간을 많이 보냈을 수록, 우리 뇌에는 특정한 생각의 홈이 더 많이 파인다. 생각이 방황할 때조차 익숙한 길을 따라가니 판에 박힌 생활에 갇히게 된다. -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18장 중에서

익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문득 <최악을 극복하는 힘>에서 비유했던 그랜드 캐니언​이 생각난다. 그렇다. 놀이도, 지루함을 즐기는 그 순간도 다 점점 홈이 파여서 점점 커다란 계곡을 만들어낸다. 우리 어른들도 지루하면 바로 스마트폰을 키듯이, 아이들에게도 지루함을 스스로 해결할 힘을 갖게 하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쥐어준다면 문제가 생긴다.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방황하고 삶의 지루함을 흥렵게 날릴 힘을 기를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인 당신이 스마트폰을 처음 접한 것은 최소한 성인이 되고 나서인것일테니 말이다. 인간의 뇌는 익숙한 길을 따라가게 된다. 뉴런은 그렇게 익숙한 것을 더 강화한다. 그리고 어려운 것은 하고 싶지 않아한다. 원제가 ‘The Shallows(얕은)’라서 경각심을 갖게 만드는 책인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모두 깊게 패인 정신적 고랑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고 있다. 즉흥연주, 토론, 그림그리기 등 예술적인 즉흥성으로 말이다. 즉흥성과 구조 간의 상호 작용을 경험하기 위해 문학을 읽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nursery rhyme이라고 부르는 동요도 마찬가지다.


내가 육아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아무런 깊은 의미를 찾기 힘든 동요들이나 동화를 아이들에게 반복해서 읽어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반복이 운율이고 그 아무 의미도 없어보이는 요소에 정신 놀이를 장려하는 강력한 힘이 숨겨져 있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https://m.blog.naver.com/onekite1025/222468215773



즉흥성과 스우파

허튼소리라도 음악적 패턴이 존재한다. 랩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쇼미더머니나 작년에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를 보며 열광했던 이유는 이런 즉흥성에서 나온 쾌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Yes, and (좋아, 그래서)는 터무니없는 것 같은 아이디어를 권장한다. 뇌는 기본적으로 안전한 것을 좋아한다.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 하지만’이 뇌의 타고난 성향에 더 가깝다. 그게 인간에게는 더욱 편하다.


변화를 오히려 즐기는 나는 엉뚱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정말 특이한 훈련(?)많이 거친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이번 기회에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도전이 두렵다던 나의 인생 파트너 남편몬의 ‘싫어, 하지만 마인드셋을 너무 과도하게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는 마음까지 말이다. 그도 생존하기 위해 악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는 문학을 통해 남편을 이해하게 되고,아이들과의 시간을 더욱 즐길  있게 되었다.


이게 책의 힘이 아닐까 싶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사고가 확장되는 경험을 얻을  있다는  말이다. 실용성만을 따지고  필요없고 허튼소리, 지루함, 비효율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는  오늘 알게 되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비효율성에서 효율성을 찾는 버릇을 못버리고 있다. 반성해야겠다. 하지만 이렇게 글로 기록했으니 미래의 나에게 자주 리마인드를 해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의 글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의 영역을 넓힐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비문학 사회과학 실용도서 덕후다. 그런 내가 이제는 죄책감느끼지 않고 문학을 마음껏 읽어봐야겠다 마음먹게 된 계기를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가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참 감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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