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최근 한 포럼에서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을 성폭행범으로 단정하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주고 사슴이 알려준 선녀탕을 찾아 선녀의 날개옷을 감춰 아이낳고 살다가 사슴의 주의를 잊고 날개옷을 내주는 바람에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그 나무꾼 말입니다.
어렸을 때 들으며 잠들던 옛날 이야기가 끔찍한 성범죄자의 행각을 묘사하고 있었다니 사뭇 모골이 송연해지는데요. 이러한 생각은 여성계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보입니다. 여성가족부 장관께서 공식석상에서 말씀하실 정도면 말이지요.
며칠 전, 인천의 한 여고에서는 국어교사가 고대가요 '구지가'를 설명하다가 성희롱 혐의를 받고 징계를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에서 거북이 머리(龜頭)가 남성 성기로 해석될 수 있다는 발언이 문제였습니다.
여성운동을 표방하는 한 커뮤니티(물론 극히 일부겠지만)에서 부처, 예수 등의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문화를 만들었다며 특정 종교를 모독하는 행위까지 저지르고 있습니다.
최근 미투운동을 필두로 성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과거를 전반적으로 재평가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모양인데요. 물론 현재 한국의 성평등 수준이 완전한 것도 아니며, 문화는 그 구성원들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가치에 대한 이런 방식의 인식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선생은 이전 글(옛날 사람들은 모두 불행했을까(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26)에서 과거의 문화를 평가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문화란 사람들이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 풍습, 가치들입니다. 과거에 어떤 문화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시점에서 해당 문화의 사람들은 그 문화가 필요했고, 개인적 동의와 관계없이 그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리라는 사실을 포함하는 것이죠.
더이상 그러한 가치들이 필요하지 않게 된 현재의 잣대로 과거의 문화와 가치들이 모두 부정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은 인식입니다. 심지어 과거의 것들을 악으로 규정짓고 파괴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큰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작용에 대한 극명한 예가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의 '홍위병'들의 만행입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에 의해 시작된 일종의 의식개혁운동이었는데요. 과거의 낡은 가치, 문화, 풍습을 척결하고 중국인들의 의식을 혁명적으로 개조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1966년에서 1976까지 지속된 문화대혁명 기간 중, 스스로를 마오쩌둥의 친위대이자 새 시대의 첨병으로 규정하고 옛 가치를 파괴하는 데 앞장선 이들이 홍위병입니다. 수천년 동안 이어 오던 중국의 문화와 문화재들의 상당수가 이 시기에 파괴되고 불탔습니다.
문화대혁명과 홍위병들의 만행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풍부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을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나라도 조선이 들어서면서 삼국시대와 고려 때 만들어진 무수한 불상들이 목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옛 가치를 부정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단지 문화재를 보존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옛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미래를 준비할 지혜를 얻기 위함이며, 과거로부터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사상과 가치를 바탕으로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보다 나은 삶을 누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죠.
서양문화의 뿌리인 그리스-로마 신화는 근친상간과 불륜, 납치와 강간 등 온갖가지 성범죄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누이인 헤라와 결혼하고도 신계와 인간계를 넘나들며 수많은 여성들에게 수많은 자식을 남긴 제우스 이야기만 해도 지면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제우스가 그들 중 누구에게 동의를 구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 본 것 같군요.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얻는 것은 제우스가 희대의 강간범이라는 사실이 다가 아닙니다. 서양 어느 나라에서건 성범죄를 조장하고 어린이들에게 잘못된 성의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로마 신화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던 적이 있었던가요?
신화와 전설, 설화와 같은 고대의 기록은 그 이야기가 만들어지던 시대의 환경과 조건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옛 기록을 통해 과거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옛 사람들의 믿음과 그들이 신봉했던 가치, 품었던 욕구는 과거와 현재를 잇고 인류의 지적 세계를 넓힐 풍부한 자료가 됩니다.
또한 과거의 이야기들은 많은 상징과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을 읽고 곱씹으며 이해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더욱 다양한 이야기들과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 많은 상징들을 만들어내고 또 소비합니다. 현대 사회를 풍부하게 하는 많은 문화는 과거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죠.
따라서 현재의 가치에 빗대어 과거의 가치는 잘못되었으니 그것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부정하자는 주장은 과거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빈곤한 역사의식'과 '빈곤한 인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고 미래는 빈곤한 역사의식과 빈곤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래도 나무꾼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분들을 위해 아랫 부분을 추가합니다.
현재 기준으로는 잘못된 것 맞습니다. 선녀와 나무꾼 읽어주시고 그부분은 잘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그리스 신화 읽어주시고 하시는 것처럼요. 그게 부모의(선생의/어른의) 역할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