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투하듯 삽니다 - 26
20년 차 나PD의 작품을 보며
최근 재밌게 보고 있는 예능을 꼽으라면 <지구 오락실>과 <환승 연애>다.
<지구 오락실>은 나영석 PD의 작품이고, <환승 연애> 또한 나PD의 사단이라고 불리는 이진주 PD의 작품이다.
사실 <1박 2일>은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부러 보지 않았고, <삼시 세 끼> 시리즈나 <신서유기> 도 다들 재밌다면서 난리일 때 찾아보지 않았다. 그나마 재밌게 봤던 건 <윤식당> 시즌1인 것 같은데, 시즌2는 보다 말았고. 여하튼, tvN의 정체성(?) 이자 한국에서 손꼽는 이름이 알려진 예능 프로듀서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왠지 찾아보지는 않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었달까.
그와 작품을 함께한 제작진에게 건너 듣기로, 일할 때도 분명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그 나이에 그 연차에 그런 평가를 받는다는 게 참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에 대해 생각을 바꿔 먹은 것은 그때부터였나 보다.
최근 <지구 오락실>과 <채널 십오야>과 같은 예능을 즐겁게 보면서, 나PD에 대한 흥미가 생겼고 그의 책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를 찾아 읽게 되었다. 이 사람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현역을 떠나지 않으면서, 여전히 사랑받는 작품에 이름을 올리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또 여행 가서 게임하고 밥해먹는 그거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스타일이지만, 그만큼 브랜드가 확고하다는 뜻도 된다.
이 책은 그가 10여 년 전 <1박 2일>에서 하차하고 간 아이슬란드 여행기+ 10년이 넘는 기간의 PD 생활에 대한 회고록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차피 레이스는 길까?
10년 전 책인 만큼 좀 으잉 하는 부분도 있다. 그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1박 2일>을 담당한 30대 시절이라 그런지 지금의 모습과는 좀 다른 것도 같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서 느꼈던 '라떼 피플'의 자조적인 웃음이나 어느정도의 겸허함(?)같은 것을 기대했는데 전혀 없었다. 이제는 흔한 것이 되어버린 아이슬란드 여행기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고, <1박 2일> 이야기도 정말 라떼같았다.
게다가 이 책은 아직은 KBS PD이던 때에, 엄청 오래 쉰 것도 아니고 100일 정도 휴가를 내고 아이슬란드 등을 여행하고 자기를 돌아보며 쓴 책인데 100일... 너무... 짧다. 내 기준엔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라고 할 만큼 절대적으로 오래 쉬어감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10년에서의 100일은 정말 찰나의 시간이기도 하고, 그같이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잠깐의 휴식 후, 파격적인 딜로 이직한 후 성공한 사람이 하는 '어차피 레이스는 기니까 천천히 가시라'라는 말이 엄청 마음 깊이 와닿는 것도 아니다.
한 5년 전쯤에 개정판을 내놓으면서 새로 서문을 쓴 것으로 보이는데, 그나마 서문의 경우 tvN으로 옮겨 성공한 중년 대장 PD로서의 지금과 모습과 비슷했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고, 콘텐츠 환경도 달라졌고, 나PD 또한 변화했다는 것인데 나는 그 점이 신기했다. 책은 별로 감흥이 없었지만, 나영석이라는 사람이 일을 대하는 태도와 이 일을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인지와 적당한 타협
얼마 전 전 회사 동료들과 만나 내가 나PD의 책을 읽었다고 했더니, 이 얘길 들은 PD친구가 말하길 "그렇게 오래 이 일을 하고도 좋아하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다"는 얘기를 했고 무척 동의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냥 운이 좋아서,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재미가 없는 설명일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질리지 않고 오래 할 수 있을까?
그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고, 그의 곁에는 훌륭한 작가와 PD 등 재능 있는 제작진들이 있다. 그만큼 능력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기에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으며, 시청률이나 화제성에서 언제나 훌륭하기에 예산도 크다. 결국 모든 것들이 맞아 들어가면서 높은 퀄리티의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PD일이 프로그램 전체를 보고, 조율하는 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사이에서의 창의성이라는 재미를 찾으려고 한다. 게다가 그 나이 치고는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서는 부족함을 인정하며, 배우려고 한다. (직접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겠지만, 들은 바로는 권위적으로 누르는 타입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의 프로그램은 그동안 해왔고 잘하는 것을 여전히 베이스로 깔고 가면서, 새로운 것을 융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고, 좋아하는 특징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좋은 점은 취하고 그렇지 않은 점은 타협하는 그런 자세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다'는 확신을 만들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은 수많은 ‘양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도 좋아하니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는 나를 지치게 만들고, 실망한다.
정확히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말로 이 분야이면 되는지, 이 직무(일)이면 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도 정확히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은 채로 자신에게 '양해' 한다면 결국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계속 배우고 잘하고 싶은 마음은 정말 좋아하는 것이라면 자동으로 따라오므로 일단 나 자신이 납득될 '그것'부터 찾는 게 먼저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길 테고, 매너리즘에서 나아갈 수 있는 힘도 조금은 충전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