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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이모 Aug 23. 2024

열두 살

거울과 액자와 시계로 덮인 휘황찬란한 숲

2.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콧등 위 쳐진 안경을 올린다. 비쩍 마른 몸, 창백한 볼, 날카로운 눈매. 화영의 엄마가 가느다란 손으로 투박한 작대기를 움켜쥔다. 작대기 끝에 달린 갈고리가 파란 천막 위 구멍을 찾아간다. 올림픽 성화를 봉송하듯 작대기를 들면 천막도 따라 솟아오른다. 파란 천막이 기둥에 걸리면 화영이네 가게도 장사를 시작한다.


좁다란 시장 골목 안, 미용실과 수선집 사이에 앙증맞게 낀 화영이네 가게는 주로 벽에 걸 수 있는 것들을 팔았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거울과 액자, 영화 포스터가 새겨진 롤 스크린, 큼지막한 숫자가 눈에 훤히 들어오는 벽시계 빼곡히 벽에 차 있었다. 째깍째깍 소리가 페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이면, 거울과 액자에 부딪힌 햇살이 소란을 피웠다. 시장 사람들은 빛과 소리로 가득한 조그만 가게를 ‘거울집’이라 불렀다.


거울과 액자와 시계로 덮인 휘황찬란한 숲을 지나면 엉성한 박음질로 만든 노란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커튼을 걷으면 신발 세 켤레를 벗어두면 하나가 떨어질 법한 작은 계단을 하나, 둘, 셋, 오르면 미닫이문이 앞을 지키고 서 있다. 스르르 문을 밀면 화영이네 가족이 먹고 자는 곳이다. 상을 펴면 식당과 공부방이 되었다가 상을 접으면 침실 겸 거실이 되는 공간. 그곳에서 화영은 열세 살까지 자랐다.


이사와 전학이 대수롭지 않던 화영은 말썽을 부린 적이 없었다. 어디서든 조용히 있던 화영은 자신에게 걱정 어린 시선이 쏟아지면 그제야 슬며시 웃는, 아니 웃어주는 어른 같은 아이였다. 열두 살 화영은 또래와 비슷한 키였지만, 몸의 굴곡에선 확연히 차이가 났다. 화영은 와이어가 있는 브래지어를 착용할 만큼 발육 속도가 남달랐다. 또래보다 키가 한 뼘 작고, 가슴이 납작한 진하는 화영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진하는 화영이네 가게 맞은편 골목 안 구석 집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나물을 다듬어 팔았다. 날씨가 서늘해지면 푹 삶은 시래기와 채 썬 늙은 호박, 동그랗게 빚은 수제비도 함께 팔았다. 할머니는 빛바랜 목욕탕 의자에 쪼그려 앉아 온종일 나물을 다듬었다. 척추뼈가 도드라질 만큼 허리가 굽고 손톱 밑이 문신한 것처럼 까맸지만, 할머니는 신문지를 깔고 칼을 잡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진하에게 비엔나소시지를 사줄 만큼 지폐와 동전이 주머니 안에서 달그락거려야 마음이 놓였으니까.


진하는 일요일만 되면 할머니에게 목욕탕을 가자고 졸랐다. 목욕탕에서 먹는 바나나 우유가 제일 맛있다며 할머니를 달달 볶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대답을 피했다. 사실 할머니는 목욕탕보다 한의원을, 한의원보다 전국노래자랑을 보며 누워 있는 걸 더 좋아했다. 진하네 사정을 아는 화영은 엄마와 목욕탕을 갈 때면 진하를 챙겼다. 한 달에 두어 번 셋이서 목욕탕을 가는 게 어느덧 공식적인 행사가 돼버렸다. 


 “이야, 우리 할머니도 이거랑 비슷한 거 있었는데, 이거 안 불편해? 어떻게 입는 거야?” 

목욕탕에서 화영이 벗어놓은 브래지어를 본 진하가 한마디 던졌다. 진하는 브래지어를 요리조리 만져 보다 납작한 자기 가슴 위에 갖다 댔다. 그리고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와 함께 브래지어가 공중 부양하자, 화영은 ‘야-아아!’ 소리치며 캐치볼을 잡듯 손을 뻗었다. 화영은 진하와 있을 때만 제 나이로 돌아왔다.

화영과 진하는 목욕탕에서 바나나 우유를 나눠 마시며 우정을 확인했다. 빨대를 콕 꽂은 화영이 찔끔 한 모금을 마시고 건네면 진하도 찔끔 마시고 화영에게 다시 건넸다. 달콤한 노란 액체는 여간해서 줄지 않았고 손에서 손을 한참 오갔다. 화영과 진하는 알았다.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식욕을 앞섰다는 것을.

 바나나 우유를 천천히 먹을수록 이별의 시간도 멀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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