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북 토크
1.
‘이번 정류장은 해수역입니다. 강북대 병원으로 가실 승객은 이번……’
지하철 문이 열린다. 월요일 저녁 8시, 한산한 역 주변, 싸락눈이 바닥에 부딪힌다. 목을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어느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 화영도 그들 중 하나다. 소매 안으로 웅크려 넣은 두 손을 빼 야무지게 입김을 불고 주머니 안으로 찔러 넣는다. 목을 길게 빼고 간판을 올려다본다. 시린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휴대폰을 바꾸던지 해야지. 충전을 해도 이 모양이네.”
화영이 주머니 속 꺼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린다. 낯선 길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곧 미간을 찌푸리며 캡처해 둔 이미지를 떠올린다. ‘지하철 3번 출구 맞은편 무슨 식당 옆 골목 이랬는데… 식당 이름이 뭐더라?’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를 써 본 적 없는 화영은 낯선 길을 나설 때면 도착지 주변 지도를 캡처해 둔다. 그럼 뭐 하나. 고물 휴대폰이 예고 없이 또 스르륵 꺼져버린걸. 화영은 손바닥을 펼쳐 또 한 번 입김을 분다. 안경 위로 하얗게 성에가 낀다. 뿌연 시야 사이로 식당 간판을 찬찬히 읽는다. ‘연화 갈비, 대구 막창, 신 아나고, 서울식당.’ 화영의 눈알이 좌우로 튕긴다.
“그래, 노란색 간판이었어! 서울식당, 저기 옆 골목이야.”
화영은 로드뷰로 봤던 이미지를 떠올린 자신이 매우 기특하다. 어깨 위로 걸친 가방 속을 벌려 안을 훑는다. 분홍색 보온병, 딸에게 선물 받은 다이소표 지갑, 낡은 수첩과 책이 다행히 제자리에 있다. 책 등 위로 싸락눈이 내려앉는다. 화영은 싱긋이 웃으며 손등으로 책 기둥을 쓸었다. 가방을 고쳐 매고 노란 간판 옆 식당 골목으로 들어선다. 빨간 벽돌로 감싼 주택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다. 듬성듬성 보이는 파란 대문과 녹슨 자전거가 장식처럼 서 있다. 통통한 배를 출렁이며 고양이 한 마리가 자전거 뒤로 서성인다. 가로등 3개와 자전거 5대를 지나치고 나서야 상가건물 하나가 보인다. 간판 대신 초록색 칠판이 앙증맞게 세워진 이곳이 오늘의 목적지란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휴, 드디어 찾았네. 이렇게 구석진 데 있을 줄이야.’ 화영의 시선은 크레파스로 색칠하듯 쓴 글자에 멈춰 선다.
<**작가 북 콘서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크레파스 때문인지, ‘환영합니다’란 문구 때문인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감정이 화영을 깨웠다. 화영은 자기도 모르는 이 감정을 일단 붙들고 싶었다. ‘딸랑’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고소한 커피 향, 폭삭한 꽃무늬 방석, 잔잔한 첼로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 동네 책방 ‘결’이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이 어린이 의자에 앉아 수줍게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바라본 화영은 갑자기 울컥했다.
‘이곳에 내가 있어도 될까…, 이걸 내가 누려도 되는 거라고?’ 슬픔과 감격이 섞인 촉촉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화영은 오른쪽 맨 뒷자리에 소리 없이 앉았다. 가방을 가슴에 안고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그래도 왼쪽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노란 털모자를 쓴 책방지기로 보이는 여성이 마이크 줄을 당기며 앞으로 나왔다.
“이렇게 추운 날, 구석진 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책방 결을 처음 오픈했을 때도 온유 작가님을 모셨었는데, 3년 후 이렇게 또 모시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 온유 작가님을 소개합니다.”
뜨거운 박수 소리가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화영도 덩달아 두 손바닥을 부딪쳤다. 터질듯한 눈물을 애써 밀어 넣고 시선을 고정했다. 화영은 간절히 바랐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이 순간의 내가 영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