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도 수아는 혼자였다. 저녁 8시가 넘으니 배가 고파왔다. 수아는 다 찌그러지고 그을린 양은냄비에 수돗물을 적당히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주방 서랍을 여니 2주 전에 주민센터에서 준 라면이 딱 1개 남아있었다. 수아는 라면 봉지를 뜯은 후 생라면을 입에 넣고 와그작 씹었다. 뾰족한 라면 줄기 하나가 잇몸을 찔렀다. “아야” 송곳니 위의 잇몸에 혀끝을 가져다 대니 살이 살짝 파여 있었다. 이네 냄비에서 물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아직 물이 완전히 끓지 않았지만, 수아는 라면과 스프를 넣고 냄비 뚜껑을 덮었다. 라면에 넣을 계란은 없었다. 2분 정도 끓인 후 가스레인지를 끄고 냄비채로 식탁에 올렸다. 이틀 전 금자 씨가 가져다준 밑반찬 몇 개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뚜껑을 여니 국물 위에 생라면 모양 그대로의 라면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수아는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휘 저은 후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3학년 1반 단톡방에 메시지가 왔다.
[알림 : 문학동아리는 시화전시회를 위해 내일 11시에 구진군청 문화센터 시교실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문학부 모두 빠지면 안 됩니다. 동아리 점수, 봉사점수 들어갑니다. @김수아, @조수진, @이경미, @고경식, @노진우 이렇게 5명입니다.]
진우가 보낸 메시지였다.
[앗싸. 4교시 땡땡이다.]
[아, 뭐야 나도 문학부 들어갈걸. 괜히 댄스동아리 들어갔네.]
[댄스동아리도 발표회 한다고 자주 빠졌잖아. 미술동아리는 그런 것도 없다니까.]
단톡방에 아이들의 톡이 줄줄이 올라왔다. 수아는 동아리 신청을 해야 하던 날, 가출을 해 학교를 가지 않았기에 선생님이 정해준 문학 동아리에 할 수 없이 들어가야 했다.
“에이씨, 이거 뭐야.”
수아는 귀찮은 마음이 들었지만, 자기 이름이 태그 된 걸 보니 이상하게 설레었다. 수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리모컨으로 티브이를 틀었다. 이미 몇 년 전에 방영했던 개그 프로가 재방송으로 나오고 있었다. 수아는 멍하니 티브이를 보며 라면을 호로록 먹었다.
다 먹은 냄비를 싱크대에 넣어두고 핸드폰으로 게임에 접속했다. 거기엔 이미 익숙한 아이디의 사람들이 모여 게임을 하고 있었다.
[@blueleelee 너 뭐 하다 이제와? 미친. 빨리 붙어]
[@ssoo123 야 존나 배고파서 후루룩 하고 왔징. 나 뭐하까?]
[@dobbyfree119 파이퍼 해. 다 깨 뿌셔]
[@ssoo123 야 씨발. 파이퍼 너무 야게야게. 엘프리모 한다]
[@blueleelee 아 씨발 저거 뭐야? 뒤에서 덮쳤어. 개짱! 나 뒤짐.]
[@ssoo123 이런 미친. 다 발라버려~]
방안 가득 게임 소리가 가득 찼다. 집 밖에선 황소개구리가 밤이 깊도록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게임을 하는 동안엔 수아는 외롭다거나 무섭다는 생각에서 멀리 달아날 수 있었다. 그 시간, 수아 아빠 형석은 읍내 술집에서 늦도록 술을 마신 후 어기적거리며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자, 오늘은 계절에 대한 시를 써보겠습니다. 시를 우리 인생에 한 번 비유해 보면서 써볼까요? 우리 홍 이장님, 지금 나이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느 계절인 것 같으세요?"
"아, 나야 맨날 청춘이지. 봄 같은 청춘이지. 내가 이렇게 늙었어도 생각이나 행동은 젊은이지, 젊은이. 아주 꽃처럼 생동해 부러."
"봄 좋아하시네. 우리 나이는 그저 지는 낙엽이여. 자나 깨나 조심하고 살아야지. 그냥 가을이지 가을이여. 그러다 한 순간에 훅 간다니께."
오늘도 홍 이장님과 만옥 씨는 티격태격한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언성을 높이진 않았다. 지아는 책상 맨 뒤에 조용히 앉아 금자 씨가 준 시를 공책에 옮겨 적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 날씨와 다르게 문화센터 교실 안은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했다.
"자, 그럼 시를 각자 써주시고요. 오늘도 30분 뒤에 낭독을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오늘은 구진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 올 거예요. 저희가 구진 중학교 문학부 아이들과 시화전시회를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선생님들께서 지은 시를 구진 중학교 아이들이 예쁘게 그리고 써서 액자에 넣고 전시회를 할 계획이에요."
김 작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왐마, 그럼 더 신경 써서 시를 써야겄네. 그냥 대충 막 쓰면 안 되겄구먼."
"오메, 진짜 그러네요이. 이러다 우리도 선생님처럼 진짜 시인되는 거 아닌가 몰라요."
"우리 선생님들은 이미 멋진 시인이시죠. 매주 시를 쓰시는데, 당연히 시인이시죠. 30분 후에 학생들 오기로 했으니까요, 우리 어르신들 집중해서 써주세요."
"네, 선생님!"
네 명의 어르신 학생들은 계절에 관한 시를 쓰기 위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소리와 지우개로 연필 지우는 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 채웠다. 남들에게 시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평소엔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이끌던 만옥 씨도 이번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시 쓰기에 전념했다.
이번에도 홍 이장님이 가장 먼저 시를 썼는지 연필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아직 고개를 숙이고 시를 쓰고 있는 할머니들을 휘리릭 쳐다보다가 금자 씨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따 우리 금자 씨는 시 쓰는 모습도 우아하구먼. 학교 댕길 때도 금자 씨가 제일로 이쁘고 공부도 잘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어째 이리 한결같은가 모르겠네."
"아이고 50년이나 지난 일이 여태껏 생각이 난다고요? 홍 이장님 기억력도 좋네."
금자 씨가 얼굴을 들지도 않은 채 홍 이장님의 말을 받았다.
"홍 이장님은 금자 씨한테만 저렇게 말이 좋다니까. 그냥 고백을 하씨요, 고백을 해."
만옥 씨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뭔 헛소리여, 나는 그냥 있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여. 금자 씨가 옛날에 말이여~”
홍 이장님이 채 말을 끝내기 전에 교실 문이 열리며 학생들이 들어왔다.
"어서 와, 너희들 왔구나. 구진 중학교 문학부 아이들이지? 자, 어서 들어와."
지아는 시 필사를 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교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5명의 아이들 중엔 지난번에 동전 노래방에서 봤던 노랑머리 아이와 진우가 포함되어 있었다. 지아는 진우를 보자 반가워 손을 흔들다 노랑머리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지아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우리 진우도 문학부여? 수아도 있네? 어서 오니라."
“네, 할머니. 지아 안녕.”
진우가 지아에게 인사를 하자 곁에 있던 남학생 두 명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진우를 쳐다보았다.
“오~ 노진우. 누구야? 응? 누구야?”
“금자 할머니 손녀.”
“아~”
그 말에 아이들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가셨다.
여학생 3명에 남학생 2명이 의자에 앉자 김 작가가 말했다.
"구진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 저랑 같은 학교 후배예요. 그래서 이번에 함께 시화전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달 말, 여름방학 시작하기 전에 전시회를 2주 동안 할 건데요. 우리 학생들이 어르신들 많이 도와줘야 해요."
"에이씨, 저는 그냥 할 게 없어서 문학부 들어온 건데요. 안 하면 안 돼요?"
노랑머리 아이가 투덜대며 말했다.
"네 이름이... 김수아? 수아야. 싫어도 해야 돼. 이거 봉사 점수랑 동아리 점수에 다 들어가."
"에이씨. 나는 그딴 거 필요 없거덩요! 어차피 아무 고등학교나 가면 그만인데.”
수아가 발로 책상을 차며 말했다. 그런 수아를 진우가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래도 수아야, 이건 학교에서 하는 일이니까 하기 싫어도 해야 돼. 그러면 음…. 우리 어르신들 시를 먼저 들어본 다음에 각자 시를 3개씩 골라주세요. 그리고 어떻게 전시회를 할지 함께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번엔 지난번에 발표를 못한 사람부터 할까요? 우리 금자 씨부터 앞으로 나와주세요. 우리 학생들도 조용히 들어주세요."
금자 씨가 손에 노트를 들고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방금 막 쓴 씨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제목 : 겨울 그리고 다시 봄
겨울이 오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진다
들에 피었던 꽃은 시들고
정답게 지저귀던 새들도 떠나고 없다
외롭고 쓸쓸하여 길고 긴 겨울밤에
언제 봄이 올꼬
언제쯤 따뜻한 봄이 올꼬
쉬이 오지 않을 계절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봄이 오는 걸 크게 기뻐하지 마라
고통과 인내가 없었다면 꽃도 피지 못하나니
떠나 간 새가 다시 돌아와도
때가 되면 다시 제 갈 길로 떠난다
쏜살처럼 가버리는 봄의 자취에
언제 봄이 갔을꼬,
언제 따뜻한 봄이 이리 빨리 갔을꼬
계절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돌고 돌아 다시 시작될
겨울 그리고 다시 봄
나의 계절도 멈추지 않고 돌고 돌아
언젠간 저 흙과 하나 되어 봄의 꽃으로 피어나리라
금자 씨의 낭송이 끝나자 다들 박수를 쳤다. 아이들은 휘파람을 불며 더 크게 환호했다.
"와, 할머니 진짜 멋지네요. 와~~ 시인 할머니 금자 씨였네!”
“자, 금자 씨와 함께 하고 싶은 학생? 손 들어볼래?”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아를 제외한 네 명의 학생이 모두 손을 들었다.
“어, 어쩌지? 그럼 금자 씨가 학생들 중에 한 명 선택해 주시겠어요?”
“그럼 저는…. 같은 동네 사는 진우랑 하겠습니다.”
“네. 자 다음은 구옥 씨? 앞으로 나오시죠.”
구옥 씨, 만옥 씨, 홍 이장님이 차례로 시를 낭송하고 짝을 지으며 소란할 때 지아는 교실 밖으로 살며시 나갔다.
밤늦게까지 키아라와 채팅을 하다 자서 그런지 졸음이 쏟아졌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라도 하고 올 참이었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서자 화장실 한쪽 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네 담배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지아가 수돗물을 틀자 피어오르던 연기가 갑자기 사라졌다. 지아는 세수를 하고 손을 털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통로 중간에 위치한 휴게실에 들어가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콜라를 뽑았다. 콜라를 한잔 들고 휴게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였냐?"
노랑머리의 수아가 휴게실로 들어오며 지아에게 아는 체를 했다.
"응? 뭐가?"
"방금 화장실에 너였냐고."
"응. 왜?"
"아니야."
"뭐 마실래?"
"내가 알아서 마실게."
수아는 칠성 사이다를 뽑아 들고 수아 옆에 앉았다.
"너 니네 할머니한테 말하지 마라."
"뭘?"
"아까 다 본 거 아니야?"
"아.... 그거...."
"말하지 마라.
"그게 어때서. 담배 피울 수도 있지."
의외의 반응에 수아가 오히려 당황하며 지아를 쳐다보았다.
"너도 펴?"
"담배? 아니. 난 안 펴. 근데 내 친구들은 많이 펴."
"아.... 그래? 그 동네 좋네."
수아는 사이다를 입에 가득 넣고 가글 하듯 입을 헹군 후 꿀꺽 삼켰다.
"하~ 담배 냄새나냐?"
"응 아직 좀 나네. 전자담배를 피워. 그건 냄새 안 나."
"야, 한국에서 중딩이 전자담배 피우면 아주 볼만하겠다."
"밀라노에선 많이 펴."
"흥 아주 웃기는 동네네."
"나 먼저 들어간다."
"야 너, 진우한테도 말하지 마. 그 세끼 알면 진짜 골치 아프다."
지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에서는 어르신들과 학생들이 짝을 지어 각자 시를 고르고 있었다. 수아는 짝이 맞지 않은 틈을 타 뒤로 물러나 지아 곁에 앉아있었다. 자신의 약점을 잡힌 터라 자기도 지아의 약점을 하나 찾아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지아는 그런 수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수아는 지아가 금자 씨의 손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금자 씨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주민 여성 집을 방문하고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금자 씨의 눈 밖에 나는 날엔 아빠 귀에 들어갈 것이고 그러면 집에서 또 쫓겨나거나 아빠한테 뒤지게 맞을 게 뻔했다.
"야, 김수아. 너 그림 잘 그리지 않냐?"
갑자기 진우가 수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 초등학교 때 그림 엄청 잘 그렸잖아. 우리 좀 도와줘. 어차피 너도 참여해야 하니까. 너가 할머니 그림 좀 그려줘.”
수아는 진우의 말에 당황하며 말했다.
"야, 나 그림 안 그린 지 엄청 오래됐는데 뭔 소리야. 나도 문학부 그냥 할 거 없어서 들어온 거야. 미쳤냐? 내가 그런 걸 하게?"
그때 금자 씨가 수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아가 그리 그림을 잘 그린다고 니네 엄마한테 듣긴 했지. 초등학교 때는 상도 많이 탔다면서. 그림 너무 보고 싶네, 수아 그림 그리는 거. 이 할미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어서 그래. 수아야, 부탁 좀 하자. 응?"
바로 옆에서 지아가 수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이 마치 '너가 하지 않으면 네가 담배 피우는 거 모두 말할 거야....'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아는 금자 씨와 지아, 진우를 돌아가며 쳐다보다 말했다.
"에이 씨발, 알았어. 뭐 하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