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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un 27. 2024

12. 당연한 사람

<소설> 나의 시인 할머니 금자 씨



당연한 사람의 건조한 말투와
당연한 사람의 투박한 손길과
당연한 사람의 무미한 눈빛에
나는 갈증을 느끼며 매달린다
사랑을 달라고 온몸으로 운다
소리치고 반항하며 흐느낀다

건조한 말투는 당신의 인내
투박한 손길은 당신의 애씀
무미한 눈빛은 당신의 노력
당연하지 않음을 겨우 알아
이것이 사랑임을 이제 알아
후회와 반성으로 통곡한다

당신의 당연한 잔소리와
당신의 당연한 부지런과
당신의 당연한 걸음걸음
당신의 모든 당연한 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았음을
당신의 빈자리를 느낀다



"수아 엄마? 나야 나. 응, 그래. 잘 지냈어? 혹시.... 수아 거기 왔는가? 안 왔어? 워매. 어짜까이. 아니 그것이 아니고..... 응, 전화가 왔었어? 아.... 그래.... 알겄네. 아니여. 내가 지금 광주로 올라가고 있응께. 수아 아빠? 아이고 그 사람은 신경도 쓰지 말어. 내가 이번에는 안 참을라니까. 응, 그래. 그러면 내가 저기 터미널로 가볼게. 울지 말고, 이 사람아. 아이고, 식당 바쁜가 보구만. 내가 도착해서 다시 전화할게. 그래, 그래."

금자 씨가 굳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진주야, 수아랑 아직 연락 안 되냐?"

"예, 할머니. 아직 톡도 안 봐요. 우씨, 계속 안읽씹이야."

"아닉씹? 그게 뭐야? 욕이야?"

"안. 읽. 씹. 톡을 읽지도 않고 씹는다는 말이야. 톡을 보면 여기 노란색 1이 없어지거든? 이게 없어졌는데도 답장이 없으면 읽씹, 아예 보지도 않고 답장도 없으면 안읽씹."

"아...."

"자, 얘들아 다시 출발해 보자. 버스 터미널로 일단 가자. 진주는 수아한테 계속 연락해봐라."

"네, 할머니."



휴게소에 들러 이것저것 먹을 걸 사온 진주와 지아는 수아를 찾으러 가는 이 길이 마치 소풍 가는 길 같았다. 논과 밭이 있는 시골을 벗어나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찬 거리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계속 들뜬 채로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수아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도 수아를 찾으러 간다 말하고 일찍 나왔으니, 돌아올 때는 진주 옆에 수아가 꼭 있어야 했다.


광주 톨게이트를 지나 터미널로 가는 길은 꽤나 복잡했다. 오랜만에 도시로 나온 금자 씨는 도로에 빽빽하게 들어찬 차와 복잡한 교통신호를 따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골에서는 운전을 곧잘 하는 할머니로 통했지만, 도시로 나오니 그저 빌빌거리며 운전하는 할머니에 불과했다. 금자 씨는 뒤차가 빵빵거릴 때마다 창문을 내리고 욕지거리를 해주고 싶었지만, 손녀들이 뒤에서 보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단지 운전대를 더욱 힘주어 잡을 뿐이었다.


"어, 할머니 수아가 톡을 드디어 읽었어요. 잠깐만요. 전화해 볼게요."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진주가 흥분한 목소리로 보이스톡을 눌렀다.

"아, 김수아~ 이 미친년아. 너 어디야?"

"뭐? 유스퀘어? 아 터미널 옆에 거기?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라. 왜긴 왜야. 지금 금자 할머니랑 너 잡으러 가고 있다. 아 잠깐만 스피커폰으로 바꿀게. 니가 직접 말해."

진주는 핸드폰을 귀에서 때고 스피커폰으로 바꾼 후 말했다.

"할머니, 수아가 왜 왔냐고 난리예요."

"수아야, 지금 광주 터미널 근처냐?"

"에이씨, 할머니 왜 왔어요? 혹시 우리 아빠한테 다 말했어요?"

"늬 아빠? 너네 아빠는 걱정하지 말어. 할미가 아주 엄포를 하고 왔으니께."

"할머니, 저 그러다 진짜 아빠한테 잡히면 죽어요."

"알아, 알아. 할미가 미안하다. 아빠가 너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엄마가 너 걱정 많이 하고 있당께."

"엄마가 날 걱정한다고요? 헐, 말도 안 돼. 내가 전화할 때 받지도 않았다고요."

"엄마 광주에 있는 거 알고 온 거 아니여?"

"광주에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어디 있는지는 몰라서.... 일단 오긴 왔는데요...."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한 10분만 가면 도착한다이."

"에? 진짜요? 나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너 작년에는 순천 버스정류장에 있었잖어. 암튼 쪼매만 기다려. 곧 도착한다이. 어디 위험한데 가지 말고. 알겄지?"

수아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수아야, 알았지? 기다려. 거기서 기다려야 된다."

"네....."

수아의 작은 대답에 금자 씨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수아는 광주종합버스터미널 유스퀘어 광장에 혼자 멍하니 앉아있었다.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잔뜩 욕을 해주려고 벼르고 있었던 진주는 그런 수아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금자 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분식집으로 가서 떡볶이와 김밥을 사주었다. 금자 씨는 수아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밥을 다 먹고 바로 옆에 있는 쇼핑몰로 가서 10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구경했다. 조금 전까지도 침울해하던 아이들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화장품 코너에서 아이들이 각자 좋아하는 색깔의 틴트를 고른 후 서로 발라보며 깔깔거리고 있을 때 저 먼발치에서부터 외국인 여자 한 명이 다가왔다. 여자의 얼굴을 본 수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수아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 있었다. 여자는 그런 수아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손을 맞잡고 한동안 서서 울고 있었다.




"할머니, 수아 안 데리고 가도 괜찮을까요?"

"응, 괜찮을 거다. 엄마가 옆에 있응께."

"그래도요. 저 선생님한테 수아 꼭 데리고 오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할머니가 수아 엄마한테 이주민여성협회도 소개해 주고, 시민단체도 연결해 줬으니까 괜찮을 거시다. 수아 아빠랑 이혼하고 한국에 살지, 베트남으로 갈지 수아랑 함께 결정하것지? 어디에 살아도 수아랑 엄마가 함께 있으니까 괜찮을 거다. 엄마잖아."

"수아 아빠는요? 괜찮을까요?"

"아따, 그 인간은 내가 경찰서에 콱 신고를 해부러야제. 요즘이 어느 세상인디 사람을 때려, 때리기를."

"할머니도 조심하세요. 술만 마시면 무서운 사람이 되니까...."

"그래야제. 그리도 우리 동네에 진주 아빠가 있잖아. 괜찮을 거시다."

"네. 저도 우리 아빠한테 말해놓을게요. 그래도 조심하세요, 할머니."

"그래, 그래."



지아와 금자 씨가 집에 돌아오니 저녁 10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하지만 지아도 금자 씨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지아는 수아와 수아 엄마가 만나 함께 울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밀라노에 있는 엄마의 모습이 자꾸 겹쳐졌다. 지아는 밀라노에서 살았던 나날들이 힘들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곁에서 모든 걸 견디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주던 엄마가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말들이 엄마의 애씀이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어느 장소가 아니라 바로, 엄마 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엄마의 목소리와 엄마의 손길, 엄마의 눈빛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한참 카페 일로 바쁠 시간이라 엄마에게 전화할 수도 없었다. 지아는 카톡 창을 열고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조금 부끄러웠지만 엄마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어 꾸욱 참았다.


"엄마, 그동안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한국에서 사는 것도 좋지만, 나는 엄마랑 함께 살아야 할 것 같아. 엄마가 해주던 밥이 너무 먹고 싶거든. 엄마 올 때까지 잘 기다릴게. 그리고 힘들게 해서 미안해."



한창 바빴던 점심시간이 지난 후 한숨 돌리며 의자에 앉아 딸이 보낸 메시지를 본 동주는 빙그레 웃음이 났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ㅎㅎㅎ 역시 우리 엄마야. 아~ 나도 우리 엄마 보고 싶다~'

동주는 엄마, 금자 씨에게 영상통화를 하려다 한국 시간을 확인하고는 꾸욱 참았다. 벌써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주와 금자 씨는 모녀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시차를 확인하고, 서로를 배려하다가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나중으로 미뤄두기만 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서운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리움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금자 씨와 동주, 동주와 지아, 지아와 금자 씨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금자 씨 너무 아쉽네요. 이번에 시화 전시회에 금자 씨 작품을 내지 못하다니. 너무너무 아쉬워요. 지금이라도 제가 해볼까요?"

"아니에요, 선생님. 시간도 없는데요 뭐. 괜찮아요. 나중에 또 하면 되지요. 괜히 아이들 고생만 시킬 건데요."

"그래도, 우리 금자 씨가 에이스인데."

"아니, 선생님. 그리 말하믄 열심히 준비한 우리는 뭐가 됩니까? 하이고 참나. 금자 씨만 맨날 아낀다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만옥 씨가 한마디 하자 옆에 있던 구옥 씨가 만옥 씨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니 왜, 성님은 아프게 남의 옆구리를 찔러쌋소. 참말로. 아니 할 말은 해야지. 왜 맨날 금자 씨만 감싸는지 모르겠다니까."

"아이고, 만옥이 자네 작품 구경이나 실컷 할라네. 홍 이장님이랑 구옥이 성님도 잘 준비하셨지요?"

"왐마, 나는 아주 그냥 그림이 영~ 맘에 안 든당께. 거 남학생들만 붙여줘 가지고 그림이고 글씨고, 아주 그냥 엉망진창이여."

홍 이장님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에이, 이장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전시회 못하는 금자 씨도 있는데요."

"아, 금자 씨 미안하요이. 내가 괜한 말을 했구만."

"아이고, 아닙니다. 홍이장님 시가 좋으니 뭔 그림을 그려도 좋겄지요."

"하, 이리 또 이쁘게 말씀을 해주시니, 역시 우리 금자 씨라니께."



시쓰기 수업 마지막 날, 각자 준비한 시화 액자를 군청 복도 한 켠에 전시했다. 구옥 씨와 만옥 씨, 홍 이장님의 작품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군청을 찾는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 앞에 서서 감상평을 한마디씩 내어 놓았다. 그들은 진짜 시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금자 씨의 작품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금자 씨의 시는 노트에 여전히 남아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금자 씨는 조바심 내지 않았다. 시를 쓰며 지낼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무엇보다 귀했기 때문이었다. 금자 씨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을 시로 연결시켰다.

시는 곳 금자 씨의 삶이 되었고, 그녀의 삶은 곳 시가 되어 금자 씨의 노트에 차곡차곡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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