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별이 보러 갈래?”
“별이?”
“응, 별이 나무 잘 있는지 보러 가자. 나도 가 본 지 좀 오래됐거든.”
“그래, 나도 가보고 싶어. 별똥별 보면서 소원도 다시 빌고 싶고.”
“가게 끝나고 가면 될 것 같아. 내가 데리러 갈게.”
“알겠어, 진우야. 정말 고마워.”
“고맙긴, 친구끼리. 이따 봐.”
전화를 끊고 지아는 화단에 쭈그리고 앉아 흙 묻은 장갑을 꼈다. 금자 씨가 없는 사이에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를 하나하나 뽑았다. 잡초를 무시 한채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며칠 사이에 엄청나게 무성해져 버렸다. 이대로 그냥 두었다가는 잡초와 꽃을 구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지아는 이 화단이 꼭 자신의 삶처럼 느껴졌다. 무심코 일어났던 나쁜 일을 그저 무시한 채 내버려 두었더니, 어느새 잡초처럼 무성해져 진짜 삶을 집어삼켰다. 나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하나하나 뿌리까지 뽑아서 버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단의 잡초를 뽑는 것처럼 땀을 흘리며 애를 쓰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문제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다는 걸 지아는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형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두문불출하던 금자 씨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 건 다름 아닌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금자 씨의 돌봄을 받았던 사람들이 이번엔 금자 씨를 돌보기 시작했다. 금자 씨의 집엔 날마다 사람들이 돌아가며 찾아왔다. 그들은 빈 손으로 올 때도 있었고, 두 손 무겁게 올 때도 있었다. 그리고는 특별하지도 않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함께 시교실에 참여했던 홍 이장님과 만옥 씨, 구옥 씨가 방문했을 때는 드디어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현관문을 넘어섰다.
“아 그라니께 나가 9살이었든가…. 우리 동네에 엿 장시가 왔는디 겁나게 먹고 싶더랑께. 아 그 당시에 그렇게 단 거를 어찌 먹겠는가? 설탕이 뭐여, 풀뿌리나 캐서 쪽쪽 빨아먹던 땐디. 근디 그 엿이 얼매나 먹고 싶었겄어.”
“알제, 알제. 시방은 먹을게 천지삐가린디 그때는 참말로 먹을 게 없었지라.”
“아따 내 말 좀 끊지 말소 좀. 자네는 어째 맨날 내 말을 끊어 싸.”
“아이고 알았소. 어여 말 하씨요. 거 참말로.”
“아 그래서 나가 부엌에 들어가서 뭐 엿 바꿀 거 없나…. 찾아본디 냄비 하나가 보이는 거여. 우리 저짝 큰집에 시집온 형수님이 하나 선물했는갑드만. 근디 우리 부엌이랑 너무 안 어울리는 거여. 냄비가 뻔쩍 뻔쩍 빛나는디 우리 부엌은 불 때고 있었응께 그걸 쓸 때도 없고 말이여. 그래서 그걸 들고 가서 나가 엿을 20개를 바꿨당께.”
“오메 오메. 그 당시에 냄비믄 참말로 귀한 것인디. 20개 밖에 안 줬다고? 시상에나.”
“아 나는 그렇게 엿을 많이 주니께 몰랐제. 그냥 들고 와서 몰래 먹었제. 근디 그걸 한 번에 어찌 다 먹겄어? 아래 동생들이 보고 있는디. 아 그래갔고 난중에 몰래 먹을라고 저 짝 산 아래 거 바윗돌 있잖은가? 거기에 나가 숨켜놨제.”
“홍이장님 참말로 자장졌구만요. 시상에나. 거 어무이한테 안 들켰어요?”
“어무이가 냄비 사라졌다고 아주 노발도발 했는디 그 엿장수는 이미 떠난 뒤였제. 그 냄비 도둑맞았다고 난리도 아녔제. 근디 나중에 엿을 숨캬논데 가보니께 아 글쎄 개미가 개미가 드글드글 한거여. 시상에나…. 얼매나 아까분지. 10개나 남가뒀는디.”
“오메오메 아까워라.”
“우리가 그런 시대를 살았네. 지금은 먹을 게 넘쳐서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리는 세상 아닌가.”
“그랑께 말이요. 이렇게 우리 시대 사람을 만나야 이런 이야기도 하지, 요새 애들한테 말하잖애? 그라믄 바로 성질을 낸당께. 무서워서 말도 못하겄어.”
지아는 이들의 말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분명 한국말인데 한국말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이들의 방문 이후 할머니는 다시 집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수아와 수아 엄마가 금자 씨를 찾아온 것은 그 일이 있은 지 2주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수아 엄마와 수아는 금자 씨를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무슨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어떨지 알 수 있었다. 그날 그들은 읍내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손님이 가장 많은 돼지갈비 집에서 천천히 고기를 구웠다. 그 식당에서 일하던 진우 엄마가 가족들을 불렀다. 진우의 가족들도 합세하여 다 함께 고기를 구웠다.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고기를 먹는 그들을 사람들은 힐끗 거리며 수군거렸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선 의심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8월 말, 다시 밀라노로 돌아온 지아는 학교에 정식으로 항의를 했다. 그동안 학년 내내 차별당한 내용과 동양인을 무시하는 선생님의 태도를 자세히 적어 부모님과 함께 교장실로 찾아갔다.
이탈리아에서는 담임 선생님과 트러블이 생기면 학생이 학교를 옮기는 것이 전례였다. 하지만 지아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약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옮기고 싶지 않았다. 대신 부당함에 대해 참지 않고 싸우기로 했다. 이런 지아의 결정을 받아들인 엄마와 아빠는 학부모 회의에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했다. 곧 교사-학부모 의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몇몇 친구들이 그 선생님의 부당함에 대해 증언해 주었고, 다른 과목 선생님들은 지아가 얼마나 성실한 학생이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인지 증명해 주었다. 이민자가 점점 늘어나는 현시점에서 학교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 선생님은 결국 더 이상 담임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 과목 선생님으로 남을 수 있긴 하지만 같은 일이 생길 경우 정직 처분이 내려질 거라고 공표했다. 이런 학교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선생님은 학교를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고용주인 학교는 선생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좌지우지할 수 없으며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는 내용이었다. 이탈리아의 노동법은 고용인 보다도 피고용인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 직원이 근무태만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자르지 못한다. 심지어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한 달을 쉬어도 뭐라고 따질 수가 없다. 회사와 직원 간의 소송이 워낙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에는 변호사가 굉장히 많은 편이다.
지아는 진정한 약자를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로스쿨에 진학했다. 공부를 조금만 하면 로스쿨에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법과 관련된 용어도 어려운데 이탈리아어로 공부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지아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용기를 듬뿍 넣어주었고, 지아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3년간의 로스쿨 과정을 끝내고 법조윤리시험까지 합격한 지아는 변호사 시험에서 낙방했다. 이 시험만 합격하면 지아는 진짜 변호사가 될 수 있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이 지난한 과정을 계속해야 할지 지아는 자신이 없었다. 또 1년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 부모님께 너무 미안하기도 했다. 지아는 화단의 잡초를 뽑으며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부정적인 생각도 함께 뽑아버리고 싶었다. 한번 자라난 나쁜 생각이 무성해져 자신의 모든 생각을 뒤덮기 전에 뽑아서 없애고 싶었다.
화단의 잡초와 생각의 잡초를 땀을 흘리며 뽑고 있는 지아 곁으로 달이가 와서 낑낑거렸다.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달이를 장갑을 벗고 쓰다듬었다. 자신의 다리에 몸을 비비는 달이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동물은 인간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존재였다. 누가 자신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직감으로 아는 것 같았다. 지아의 손으로 전해지는 달이의 체온을 느끼며 교감이란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것을 넘어 서로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따스한 감정의 교감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금자 씨를 만나고 온 지아는 할머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의지와는 별게의 문제이지만 그래도 조금만, 조금만 더 할머니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에 소원을 빌어봤자 아무 효과도 없다는 걸 알 나이가 되었지만, 지아는 소원을 비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간절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에는 강아지를 키우는 게 가장 큰 소원이었다. 이번엔 할머니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생각이다. 지아는 벗었던 장갑을 다시 끼고 나머지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