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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포 Jan 14. 2021

우체국장 술잔

술자리의 파워 게임과 수작 문화

전국의 우체국장님께는 매우 불경스러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술자리에서 우체국장 술잔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연유는 이렇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이야기입니다. 고장의 기관장 모임에 당연히 우체국장도 참가하는데 술잔이 주로 힘깨나 쓰는 기관장들에게만 집중되다 보니 우체국장 술잔은 항상 비어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회식자리에 잔이 자주 가지 않거나 술잔이 오랫동안 비워져 있으면 우체국장 술잔이라고 빗대어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갑니다. 술잔이 비어있으면 다른 사람이 따라 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요? 스스로 따라 마시면 안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술자리 문화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문화에서나 술잔과 그 잔에 술을 담아 마시는 행위에는 각별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때로는 술잔이 그들이 속한 문화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술잔을 받아 마시는 방법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독작(獨酌) 문화입니다. 말 그대로 스스로 따라서 스스로 마시는 것으로 서양 음주법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두 번째가 대작(對酌) 문화입니다. 상대에게 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며 같이 마시는 것으로 중국의 음주법입니다. 중국 무협영화를 보면 잔을 마시고 빈 잔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음주법입니다. 세 번째가 수작(酬酌) 문화로 소위 잔을 돌리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전통 음주법입니다.


<잔을 건네는 장면, 자료 : wikimedia>

수작 문화의 전통이 살아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술을 마시고 싶어도 남이 따라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기관장 회식에 참석한 우체국장께서 쓸쓸하게 빈 술잔만 처다 볼 수밖에요. 지금은 정보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투어 술잔이 가겠지만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작 문화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사용하던 음주법이었으나 현재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수작(酬酌)은 잔을 주고받는 것에서 출발하여, 말을 주고받는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어림 없는수작'이나 '수작 부린다'에 나오는 수작은 모두 여기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잔을 주고받다 보니 정도 주고받았을까요? 공음례와 대포지교(大匏之交)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강력한 결속력과 조직력을 가진 공동체가 바로 보부상인데 이들은 큰 대포잔에 술을 부어 같이 마시는 의식을 치르고 공동체의 일원임을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여기서 기원하여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사이를 '대포지교(大匏之交)' 라고 했습니다. 대포(大匏)는 큰 바가지라는 뜻입니다. 한때 골목마다 있었던 대포집은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수원에 있는 비 내리는 추억의 대포집


공음례의 전통은 보부상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육조 삼관을 비롯한 관아에서도 큰 술잔에 술을 부어 같이 마시는 공음례가 의식화돼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대학에서 신입생 환영식을 하면서 사발식을 하는데 그 의식도 어찌 보면 매우 전통 있는 공음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공음례는 술을 같이 나눠마시는데 비해 오늘날 대학생들의 사발식은 주량을 자랑하는 자리로 왜곡된 것이 흠이라면 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사발식 장면, 몇년 전까지 홈페이지에 게시돼 있었음


프랑스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는 "한 사회의 문화적 특성은 음식문화에 압축돼 있다"라고 했습니다. 음식문화에서 술은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나라의 음주법을 알면 그 나라의 음식문화와 놀이 문화, 대화 방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체국장 술잔’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우리나라의 독특한 음주 문화와 독특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젠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지속돼 왔던 잔을 주고받는 수작 문화는 없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코로나 19가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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