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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다올 Sep 19. 2024

쪽빛으로 물든 삼천리골


사위질빵 향기에 취해    

짙은 안개와 푸른 숲으로 뒤덮인 의상능선 용출봉의 신비한 기운이 산아래까지 뻗쳤다. 그 기운이 서린 산등성이를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크고 작은 골로 모여 삼천리골 시내를 이루었다.

탐사는 개천을 거슬러 삼천사를 지나 깊숙한 산골짜기로 이어진다.

은평한옥마을에서 북한산 둘레길 9구간 마실길

이정표를 따라 무지개 나무다리를 건너면 은행나무 숲이 나온다. 산책 나온 아기 엄마는 은행나무 숲과 돌탑을 배경으로 열심히 아이 사진을 찍는다. 건너편 느티나무 벤치엔 청춘 남녀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어 그 모습이 참 정겹다. 부러운 마음에 어슬렁거리다가 갈 길을 보챈다.     


   아름드리 참나무 군락에 이어 마실길 홍예문이 보인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을 지나자 나무 울타리 너머에서 술잔을 주고받는 등산객들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지난 세월 자신이 살아온 영웅담과 허세 속에 술잔이 오가고,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산꾼들은 술잔을 주고받는다.   

산꾼들의 쉰소리를 뒤로 하고 둘레길을 따라 걸어가면 삼천리골 임도가 나온다. 고향 언덕배기 같은 산자락에 길이 나 있고, 느티나무 숲으로 뒤덮인 길 위를 개똥지빠귀가 날아다닌다. 기슭엔 이파리 무성한 밤나무에 밤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초가을 한낮의 햇볕에 여물어간다.           


   삼천리골 미타교에 성운 큰스님의 법어 “분노치 말고 용서하기로, 원망하지 않고 사랑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노승이 죽장을 내리치며 속세의 사대부중에게 일갈을 가하는 듯하다. 속인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계곡 자락을 바라보며 미타교를 건넌다.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나마 놀란 가슴이 진정된다. 장모의 사위 사랑 전설을 품은 사위질빵 은은한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온다. 기슭 수풀 위에는 시골 초가지붕에 핀 박꽃처럼  연한 노란색을 띤 사위질빵 하얀 꽃이 즐비하게 피었다. 그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고 도량 가는 길을 꽉 채운다.    

 

   장모와 사위질빵 전설은 이렇다. 가을 추수철에 사위가 처갓집 가을걷이를 도와주려고 왔는데 사위를 생각한 장모가 사위가 무거운 짐을 지지 못하도록 지게 질빵끈을 쉽게 끊어지는 사위질빵 덩굴로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장모의 마음을 빗대 이 식물 이름을 사위질빵이라고 불렀다.

사위질빵 꽃은 한여름부터 꽃대가 올라오면서 개화하기 시작하여 늦여름까지 꽃이 무리 지어 핀다.

꽃은 잎겨드랑이에 원뿔모양의 꽃차례로 달리며, 꽃받침은 4개로 끝이 뾰족한 계란형이다. 한꺼번에 덩굴 위로 수백 수천 송이 연노랑색을 띤 하얀 사위질빵 꽃무리는 그 향기가 은은하면서도 진하다.

사위질빵 향기가 절간의 향 내음을 감싼다. 도량 대웅전의 향 내음인지 사위질빵 꽃 내음인지 속인은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한여름의 사위질빵)


쪽빛 삼천리골 스케치

사위질빵 향기에 취해 절간 일주문을 들어섰는지도 몰랐다. 비봉과 사모바위로 가는 응봉능선 이정표가 나오고, 일주문 산기슭 벽오동(碧梧桐) 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벽오동 잎은 오동나무와 닮았으나, 그 줄기는 푸르고 매끈해서 ‘푸를 벽(碧)’자를 써서 벽오동이라고 부른다. 벽오동 나무의 줄기에도 엽록소가 있어 광합성 작용을 한다.

예로부터 벽오동은 전설의 새 봉황이 벽오동 나뭇가지에만 앉는 상서로운 나무로 알려졌다. 봉황과 벽오동 나무가 고사성어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화투패 오동 광(光)에도 벽오동 열매를 따먹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삼천사 담장을 지나 스님이 짚고 다니는 지혜의 지팡이 석장(錫杖, 주장자) 대신 속인은 등산지팡이를 짚고 터벅터벅 산길을 오른다. 늦더위를 식히려고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삼천리골 계곡에 꽉 들어찼다.

물가에 앉아 도란도란 정답게 얘기를 나누는 아낙네들, 물장구치면서 어른이 되면 그리워하게 될 지금 이 순간을 마냥 즐거워하는 개구쟁이 아이들,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나온 중년의 부부와 이팔청춘도 보인다. 이들 모두가 일상을 뒤로한 채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일이면 다시 새로운 오늘이 될 테지만, 내년이  좋은 기억으로 남을 테고, 훗날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쉼 없이 걷는다. 계곡의 물소리와 솔바람소리에 몸을 맡긴 채, 쪽빛으로 물들어가는 산천리골 계류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바위에 부딪힌 물줄기는 널따란 반석 위에 물결 나이테를 만들고, 허연 비늘을 반짝이며 떼 지어 다니는 피라미처럼 포말을 일으키며 쪽빛 담으로 모여든다.  

‘쪽(藍)’은 예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옷감을 물들일 때 사용하던 식물이다. 그 빛깔이 하도 고와서 ‘쪽빛, 쪽빛 하늘, 쪽빛 바다’라는 말과 고사성어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청출어람 청어람은 ‘푸른색은 쪽에서 나온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라는 뜻으로, ‘스승보다 제자가 더 뛰어나다’라는 은유적인 의미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빛 중에서 일곱 가지 무지개색이라고 알려진 가시광선은 다른 물질의 입자와 충돌하면 파장이 긴 붉은빛은 통과하거나 흡수되고, 파장이 짧은 푸른빛은 반사된다.

가시광선의 푸른빛이 물속 광물질에 흡수되지 않고 반사되어 우리 눈에는 물이 쪽빛처럼 파르스름하게 보인다.

쪽빛 삼천리골 계곡에 한 줄기 바람이 불고 잔물결이 일렁인다. 물결 위로 햇살이 스며들어와 물바닥까지 훤하게 비추고 실금을 그은 듯 물결이 갈라져 보인다.

잔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물비늘이 요동치고 햇살에 윤슬이  반짝인다.

윤슬은 하도 고와서 맑고 파르스름한 물이 새 단장을 하고 눈망울을 반짝거리는 것 같다. 윤슬은 햇빛이 만들어낸 마술이다.

(삼천리골 윤슬)


적멸보궁 고찰 삼천사

산을 바라보니 용혈봉이 우뚝 버티고 서 있다. 북한산의 명품 의상능선은 첫 봉우리 의상봉에서 힘을 모으고 고갯마루에서 잘록한 결인처를 만든 뒤, 용혈봉에서 머리를 쳐든다. 능선의 용맥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삼천사로 내리 꽂히듯이 입수한다. 용맥은 삼천사 마애불 길상터에서 혈을 맺고 용틀임하면서 기운을 도량에 쏟아붓는다.     

그 기운이 계곡으로 뻗쳐와 물줄기는 거세진다. 힘을 모은 물줄기가 폭포에서 물보라를 일으키자 개천에 는개 내리기 시작하고 무지개다리가 나타난다.

쪽빛 삼천리골이 진면목 드러내는 순간이다.       


   옛 삼천사지 이정표는 부왕동암문 0.6 킬로미터, 삼천사 탐방지원센터 2 킬로미터라고 안내한다. 절터는 증취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이 거대한 암릉에서 혈을 모은 뒤, 혈장을 튼 곳에 자리 잡았다.

칡덩굴과 억새만 무성한 절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탑신과 장대석을 바라보니 문화유산을 이대로 방치해 두는 게 못내 아쉽다. 석축 틈새 며느리밥풀은 자색꽃으로 치장하고서 누굴 기다리나 보다.     

숲 속에 폐허가 된 옛 도량을 바라본다. 찬란했던 그 시절 무수한 사대부중이 부처님 전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세월의 덧없음과 인간 세상의 무심함이 생각나 무심코 산봉우리를 쳐다보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하산길에 삼천사에 들린다. 작은 암자가 있던 마애여래 길상터에 지금의 삼천사가 자리하고, 적멸보궁을 친견할 수 있도록 도량 담장문을 열어 놓았다. 문으로 들어서자 세존 진신사리 3 과를 모신 적멸보궁 사리탑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도량으로 부처님이 항상 이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는 곳임을 상징한다.

정적이 흐르고 주변은 숙연하다. 적멸보궁 사리탑 앞에서 두 손 모아 합장한다. 생전에 부처님께 귀의하신 부모님과 장인·장모님을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운다.         


   길상터 마애불이 부처님 진신사리 바라보며 수호신처럼 적멸보궁을 지키고 있다. 병풍바위에 새겨진 보물 마애여래입상은 고려 초기 불상으로 돋을새김과 볼록한 선 새김을 하여 섬세하고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이 마애불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마애불 단 아래에서 불자들이 절을 하고 있다. 백팔 배를 먼저 마친 보살은 가부좌를 틀고 염주를 굴린다. 염불을 외우면서 무얼 그리 빌고 있는지 보살의 몸은 미동조차 없다. 속인도 삼배를 올리고 사찰로 내려간다.      

계곡 난간을 따라 대웅보전을 지나자 비룡교에 거대한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 중이다.

산기슭엔 지장보살이 도량을 두루 아우르고, 범종과 법고가 나란히 홍예교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다.        

     

   비룡교 아래 삼천사 일주문을 지나자 절간 마당이 나오고, 연못과 석탑이 빈 터를 채운다. 수련이 꽃을 피운 연못에 거북 바위가 눈을 지그시 감고 수행 중이다. 절간의 연꽃 향기에 거북이도 취한 모양이다.

불자들이 연못 옆 9층 석탑을 돌면서 염불을 왼다. 속인도 9층 석탑 해탈문으로 들어가서 탑돌이를 하면서 마음을 다스려본다. 편안과 사유의 고요가 찾아와 주기를.

9층 석탑은 세존 진신사리 10 과를 모시고 있다. 월정사 9층 석탑을 닮았는데, 탑신은 인도 아소카왕의 문장을 하고 있어 독특한 모양새다.

절간 바깥 마당엔 5층 석탑이 사찰을 호위하듯 입구에 버티고 서 있다.

(증취봉 아래 삼천사 옛 절터)

 

    삼천사 도량을 나와 은평한옥마을로 내려간다. 삼천리골 하류에 있는 다리를 건너자 정자가 보인다. 정자 옆에는 우물과 목각 대장군과 돌항아리와 솟대가, 진입로에는 삼각산 적멸보궁 삼천사 입석이 우두커니 서 있다. 사진 몇 장을 남기고 대로변을 따라 이십여 미터를 가면 수생식물원이 나온다. 데크를 따라 식물원 가온다리에서 갈대와 부들로 가득 찬 늪지대 수생 생태계와 오늘 걸어온 삼천리골을 바라보면서 옷깃을 여민다. 버스에 몸을 싣고, 집밥이 생각나 구파발 롯데캐슬 버스정류장에 있는 단골 식당 ‘이모네로 간다.  

       


[참고 자료]

삼천사 경내, 삼천사 옛터 안내문     

은평문화원 홈페이지, 삼천사  


[산행 안내]     

<산행코스> 은평한옥마을-북한산둘레길 마실길 이정표-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삼천리골 계곡-삼천사 옛터-(원점 회귀)-삼천사     

<산행거리> 8km, <소요시간> 4시간, <난이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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