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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 서점원 Aug 31. 2022

살아있음

2019

손톱을 정기적으로 케어받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나는 어떤가? 손톱이 일상생활에 불편을 끼칠만큼 거슬린다면 그때가 깎는 날이다. 그리고 손톱을 깎는 일은 우선 순위가 높지 않아서 최대한 미루고 미루기 마련이다. 열개의 손톱을 깎는 건 딱히 큰 품이 드는 일은 아니지만, 어쩐 일인지 귀찮다. 하루이틀 미룬다 해서 큰일이 벌어지지도 않는 사소한 일이라 더욱 그렇다.


한 친구는 배고픔을 느낄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다른 누구는 고통을 느낄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온라인 게임에서 다른 유저와 pvp를 할때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뿜어져 나오는 생생한 생명력. 살아있음! 그것 말이다.


나는 손톱을 깎는 순간에 ‘살아있었구나.’를 느낀다. (과거형이다.) 손발톱을 자라게 하는 영양소가 전부 머리털과 수염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손톱을 깎으며 ‘나 그간 잘 살아냈구나.’를 다시금 깨닫는다. 언제 자랐는지는 모르지만 시간을 흘리다 보니 어느새 자라 있는 생명. 딱히 노력을 들이지도, 바라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보면 쑥 자라나 있는 생명. 알아서 쭉쭉 자라는 생명. 거치적거려서 잘라낼 때가 되어서야 눈 여겨 보는 그런 생명 말이다. 손톱은 성장이고 살아있음이며 늙음 또는 흘러감의 척도라 할 수 있다. 더 이상 손톱이 자라지 않는다면? 멈췄다는 의미가 되므로 나는 조금 슬플지도 모르겠다. ‘잠시 걸음을 멈췄더니 바쁜 타인에겐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라는 아주 유명한 작가가 쓴 글귀도 있지 않은가. (아니다. 내가 쓴 문장이다.)


손톱을 이야기하니까 발톱이 떠오른다. 손가락이 영어로? 핑거! 그럼 발가락은 영어로? 발이 풋이니까 풋핑거? 미안합니다.


내 발톱은 새 발톱이다. 말 그대로 진짜 새(NEW) 발톱이다. 몇 해 전 제주에서 지낼 때 숙소 사장님의 소개로 동네 어르신의 귤밭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할망들이 귤을 따서 바구니를 내려놓으면 그걸 들고 창고로만 옮기면 되는 단순한 작업이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곳은 귤‘밭’이 아니라 귤‘산’이었고 내가 귤 바구니를 옮겨야 하는 창고는 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귤 바구니는 결코 무겁지 않았지만 산이 진짜 그냥 야산이었으므로 나는 하루 종일 산을 탔다.


겨우 겨우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신발을 벗으니, 이미 양쪽 양말이 핏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양쪽 엄지 발톱은 새까맣게 멍이 든 채로 덜렁거리더니 결국 이튿날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말 그대로 뽁, 하고 떨어졌다. 아픈 것보다는 신기했다. ‘오! 난 이제 발톱이 없어! 발톱 빠진 사람이야!’ 그렇게 한동안 발톱 없이 지냈는데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았다. 놀라운 건, 이후에 정말 싹이 돋듯 빠진 발톱 자리에 새 발톱이 조금씩 다시 자라났다는 거다. 발톱은 수줍게 자라나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몸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느낀다. 이제는 까지거나 찢어지거나 베인 상처는 물론, 근육통까지도 낫는 속도가 꽤나 느려졌다. 한창 칼을 쓰던 시절(육가공과 정육일을 했었음)에는 칼에 베여도 3~4일이면 흉터도 없이 잘 아물었는데, 요즘에는 일주일이 넘도록 붙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점점 손톱을 깎는 주기가 멀어지고 있다. 멈추지는 않겠지만 왕성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 서운하기도 하다. 뿜뿜 터져 나오던 생명력이 이제는 졸졸 새어 나오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깎이기 위해 자라나는 손톱이지만, 깎이는 기능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손톱이지만, 그래도 역시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아쉽고 서운한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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