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캔에 1만원. 내일은 쉬는 날. 지금 시간 밤 11시. 무엇을 더 고민하랴. 나는 캔 맥주를 사러 편의점으로 나섰다. 직선거리는 대충 50M고, 길 따라 걸어가면 대충 100M정도 걸리는 동네 편의점.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는데, 편의점을 코 앞에 두고는 슬리퍼의 발등 부분이 떨어졌다. 아, 이런 낭패가 있나.
여기서 낭패란, 앞다리가 없는 이리 ‘낭’과 뒷다리가 없는 이리 ‘패’는 서로 합심하지 않으면 제대로 걸을 수 없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나의 경우엔 왼쪽 슬리퍼 ‘낭’이 고장 나서 오른쪽 슬리퍼 ‘패’ 역시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밤 11시 편의점 가는 골목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무튼 그 순간(그러니까 슬리퍼가 떨어져서 비 온 뒤 축축한 바닥을 맨발로 한번 즈려 밟은 후 동작그만 상태)에서도 내 머리속에서는 두 가지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하나는 웬일인지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였고, 다른 하나는 ‘석유왕의 나라, 아랍에미레이트에서는 차를 타고 가다가 고장이 나면 그냥 길에다 버리고 새 차를 주문해서 타고 간다더라. 그 차가 람보르기니거나 엔쵸 페라리라 하더라도 말이다.’였다. 그래, 발 없는 말은 멋지지 않지만 석유왕은 멋있으니까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편의점으로 들어가 당당히 새 슬리퍼를 샀다.
그렇게, 갈 때는 헌신을 신고 갔다가 올 때는 새신을 신고 왔는데, 오는 동안에는 석유왕의 마음으로 득의양양 했으나 어쩐 일인지 집에 도착해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그 동안 내 발이 되어 나와 함께 해주었던 헌 슬리퍼와의 추억이 밀물처럼 몰려들어와 약간은 슬퍼졌다.
아니, 어쩌면 헌 슬리퍼와의 추억이 슬프다기 보다는 그 슬리퍼를 신었던 누군가가 그리웠던 걸지도 모르겠다.